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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기[橘棊]~귤노[橘奴]~귤리호수[橘裏皓叟]~귤만거[橘滿車]


귤기[橘棊]  옛날 중국의 파공(巴邛)에 사는 사람 집에 귤나무가 있었는데, 서리가 내린 뒤 서 말들이 항아리만 한 귤이 자라 그 속을 갈라 보니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내기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귤중지락(橘中之樂)’, 또는 ‘귤중희(橘中戲)’라고 한다. <幽怪錄 卷3 巴邛人>

귤노[橘奴]  목노(木奴)와 같은 말로 감귤의 별칭이다.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단양 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이 무릉(武陵) 용양(龍陽)의 사주(汜洲) 가에 감귤 천 그루를 심어 놓고, 임종할 때 자식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사주 가에 목노 천 그루를 심어 놓았으니, 네게 의식(衣食)을 책임 지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48 吳書 三嗣主傳 孫休>

귤도회위지[橘渡淮爲枳]  주례(周禮) 고공기 서(考工記序)에 “감귤이 회수를 건너 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橘踰淮而北爲枳]”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귤리선[橘裏仙]  파공(巴邛)의 어떤 집에서 서리가 온 뒤로 귤을 다 따고 두 개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따서 쪼개 보았더니 귤마다 흰 수염을 한 노인 둘이 장기를 두며 웃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이 가운데 즐거움이 상산(商山)보다 못하지는 않지만 오래 있을 수는 없구나.”라고 하고는 다른 노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올라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玄怪錄 卷3>

귤리정정[橘裏丁丁]  위기(圍棋)의 즐거움을 말한다. 촉(蜀) 나라 사람이 귤원(橘園)이 있어 가을에 귤을 수확했는데 대귤(大橘)이 크기가 항아리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을 쪼개 보니 그 속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하였다. <유괴록(幽怪錄)>

귤리호수[橘裏皓叟]  옛날 파공(巴邛) 사람이 자기 귤원(橘園)에 대단히 큰 귤이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쪼개어 보니, 그 귤 속에 수미(鬚眉)가 하얀 두 노인이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은 상산(商山)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뿌리가 깊지 못하고 꼭지가 튼튼하지 못한 탓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따 내리게 되었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玄怪錄 卷3>

귤림서원[橘林書院]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곁에 있다. 선조 11년(1578년)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가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祀廟)를 세운 데서 비롯된 서원이다.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다.

귤만거[橘滿車]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풍채가 좋아서 술에 취해 양주(揚州)를 지날 때면, 길가 청루의 기생들이 다투어 귤을 던져 그의 탄 수레에 가득했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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