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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라[金羅]~금락[金諾]~금란[禁亂]~금란[金鑾]~금란[金蘭]


금라[金羅]  현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의 옛 이름이다.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  1639년(인조17)에 조임도(趙任道)가 편찬한 책으로, 경상남도 함안 지방에서 배출된 인물의 전기(傳記) 및 특이한 문장을 가려서 저술한, 일종의 향토인물 문학사전이다. 이 지방을 이해하는 데 귀한 자료이다.

금락[金諾]  금과 같은 승낙. 틀림없는 승낙. 계포일락(季布一諾). 줄여서 계락(季諾)이라고도 한다. 초한(楚漢) 시대에 계포(季布)가 처음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뒤에 한왕(漢王)에게 가서 하동 태수(河東太守)가 되었는데, 그는 본디 자기가 한번 승낙한 일이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서 신용을 잃지 않았으므로, 초인(楚人)들 사이에 일찍이 “황금 백 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한 승낙을 얻는 것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라는 속어가 나오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금란[禁亂]  금제(禁制)의 법령을 어겨 난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이른다. 금란사령(禁亂使令)이 금란패(禁亂牌)를 갖고 가서 단속한다.

금란[金鑾]  제왕의 수레 또는 그 수레의 장식물이다.

금란[金鸞]  금란전(金鸞殿)의 준말로,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보통 금란(金鑾)으로 많이 쓴다.

금란[金鑾]  금란전(金鑾殿). 당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문인 학사들이 천자의 조칙을 기다리던 곳이다.

금란[金鑾]  당(唐)나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들이 머물던 금란파(金鑾坡) 위에 있는 금란전(金鑾殿)을 말하는데, 보통 관각(館閣)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금란[金鑾]  옛날 황궁의 정전(正殿)을 금란전(金鑾殿)이라 하는데, 그 곁에 있는 언덕을 금란파(金鑾坡)라 한다. 이 금란파가 한림원(翰林院)과 잇닿아 있기 때문에 한림원을 금파(金坡)라고도 한다. 조선에서는 홍문관(弘文館)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顯宗)이 이백(李白)을 금란전(金鑾殿)에 불러들여 당시의 일을 논하였다. 그때 이백이 시 한 편을 지어 바치니 현종이 그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친히 국맛을 보고 간을 맞췄다고 한다.

금란[金蘭]  마음을 함께 하는 깊은 우정을 말한다. 주역(周易) 동인괘(同人卦)에 대한 공자의 설명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함에 그 예리함이 쇠붙이를 끊고,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향과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구절이 있다. <周易 繫辭上>

금란[金蘭]  친구 간에 의기가 투합한 것을 말한 것인데, 변치 않는 좋은 우정을 뜻한다.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하였으니, 이는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하여 매우 두터운 우정을 뜻한다.

금란[金幱]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 금란리에 있는 해식동굴인 금란굴(金幱窟)을 가리킨다. 혹자는 난초가 그 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금란(金蘭)이라고 하고 혹자는 항상 광채가 가사의 금빛 통 옷과 같기 때문에 금란(金幱)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통천군 동쪽 12리에 있다. 안축(安軸)의 서문에 ‘통주 남쪽 교외에 꼭대기 벗겨진 둥그스름한 봉우리가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는데, 그 봉우리의 깎아지른 벼랑에 굴이 있으니 넓이가 7, 8자는 되고 깊이는 10여 보(步)는 된다.……전하는 말에, 이 굴은 원래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므로 사람이 지성으로 귀의(歸依)하면 보살이 바윗돌에 나타나고 푸른 새가 날아오니, 이래서 신령하게 여긴다고 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총석정에서 바다로 나가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역시 10여 리이다.”라고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5 江原道 通川郡, 歙谷縣> 현무암이 해식 작용을 받아 형성된 이 동굴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풍경을 자아내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와 노래를 남겼다. 북한에서 천연기념물 제215호로 지정하였다.

금란[金蘭]  강원도 통천(通川)의 이칭(異稱)으로, 금란 일대는 우리나라 제1의 선경(仙境)으로 알려져 왔는데, 신라 시대에는 금양군(金壤郡)이었고 별호로 금란이라 칭하였다. 이 지방은 신라의 화랑(花郞)들이 동해안 순례를 할 때 주된 목표지로, 화랑들은 수백 혹은 수천여 명이 무리를 지어 금성을 떠나 강릉・양양・고성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심신을 수련하였다. 금란은 화랑들이 마음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끓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란산(金蘭山)・금란굴(金蘭窟)・금란산성의 지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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