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금란실대군[金鑾失對君]~금란옥수[金蘭玉樹]~금란전[金鑾殿]


금란부[金蘭簿]  친밀한 벗의 이름을 적은 종이첩이다.

금란소[禁亂所]  과거를 보는 곳에서 금란(禁亂)을 맡아 시행하는 처소를 말한다.

금란실대군[金鑾失對君]  맹호연(孟浩然)이 일찍이 태학(太學)에서 시를 읊었는데 감히 당할 사람이 없어서 장구령(張九齡)과 왕유(王維)가 항상 이를 칭찬하였다. 왕유가 사사로이 내서(內署)에 맞아들였다가 현종이 이르자 맹호연이 평상 아래로 숨었는데, 왕유가 사실대로 고하자 현종이 불러서 보고 그가 지은 시를 물었다. 맹호연이 자신이 지은 시를 외웠는데 ‘재주 없는 나를 명철한 군주가 버렸네.[不才明主棄]’라는 구절에 이르러, 현종이 말하기를 “경이 벼슬을 구하지 않은 것이고, 짐은 경을 버린 적이 없는데 어찌 나를 무고하는가?[卿不求仕, 而朕未嘗棄卿, 奈何誣我?]”라 하고, 이로 인하여 쓰이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新唐書 卷203 文藝列傳下 孟浩然>

금란옥수[金蘭玉樹]  사안(謝安)이 그의 숙부 현(玄)에게 묻기를 “부형이 왜 자제의 아름답기를 원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면 지란(芝蘭)과 옥수(玉樹)를 자기 집 뜰에 났으면 하는 것이지요.”라 하였다.

금란일도[金蘭一道]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다리’라는 말로, 견우와 직녀의 깊은 사랑을 이어주는 오작교를 미화한 표현이다. 금란(金蘭)은 본디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의 “두 사람이 마음이 같으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을 수 있도다. 마음을 함께한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도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매우 친밀한 사귐이나 두터운 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금란자[金鑾子]  백거이(白居易)의 맏딸 이름. 백거이(白居易) 부부는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원화(元和) 5년(810년), 금란자(金鑾子)가 생후 “八十有六旬”(860일) 되던 때에 병으로 잃었다.

금란전[金鑾殿]  금란전은 당 덕종(唐德宗) 때 금란파(金鑾坡) 위에 세운 전각으로, 학사와 문인들이 있던 곳이니, 주로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대명궁(大明宮) 자신전(紫宸殿) 북쪽을 봉래전(蓬萊殿), 그 서쪽을 환주전(還周殿), 환주전의 서북쪽을 금란전이라고 했다. 봉래전 서쪽 용수산(龍首山)의 지맥에 평지가 융기해 있는데 그 위에 지은 것을 금란전이라 하고 그 옆에 있는 언덕을 금란파(金鑾坡)라고 했다.

금란전[金鑾殿]  당(唐)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의 이름으로 현종(玄宗)이 이백(李白)을 불러 만났던 곳이다. 혹은 송(宋)나라 도읍인 변경(汴京)에도 금란전이 있었다고도 한다.

금란전상선[金鑾殿上仙]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금란전은 당나라 때 학사와 문인들이 있던 궁전이다. 일찍이 당 현종(唐玄宗)이 이백을 금란전에 불러들여 당시의 일을 논하다가, 이백이 시 한 편을 지어 바치자 그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친히 국의 맛을 보고 간을 맞췄던 일이 있다. <新唐書 卷202 李白列傳>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