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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봉사[己酉封事]~기유생[棄繻生]~기유음식[器有飮食]


기유명부구수[旣有名復求壽]  범방(范滂)은 후한 때의 지사(志士)로, 환제(桓帝) 때에 당고(黨錮)의 화(禍)에 연좌되어 체포령이 내리자, 함께 도망치자는 현령(縣令) 곽읍(郭揖)의 청을 뿌리치고 자진하여 감옥으로 나아갈 적에 그의 모친이 나와서 영결(永訣)을 하므로, 그가 모친에게 사뢰기를 “아우 중박이 효성스럽고 공경하여 넉넉히 어머니를 공양할 만합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 용서군을 따라 황천으로 돌아가면 생존한 이와 죽은 이가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직 어머니께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은혜를 잘라 버리시어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仲博孝敬, 足以供養. 滂從龍舒君歸黃泉, 存亡各得其所. 惟大人割不可忍之恩, 勿增感戚.]”라고 하자, 그의 모친이 이르기를 “네가 지금 이응, 두밀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이미 훌륭한 명성을 얻고 다시 오래 살기까지 바란다면 다 겸하여 얻을 수 있겠느냐.[汝今得與李杜齊名, 死亦何恨? 旣有令名, 復求壽考, 可兼得乎?]”라고 하였는데, 범방은 모친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길로 가서 처형을 당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范滂>

기유봉사[己酉封事]  주자(朱子)가 순희(淳熙) 16년(1189)에 작성한 봉사(封事)이다. 2월에 송(宋) 효종(孝宗)이 양위하여 광종(光宗)이 즉위하였다. 이에 광종을 위해 올리려고 이 봉사를 작성하였으나 끝내 올리지는 못했다. 학문에 힘써 마음을 바르게 할 것, 수신제가할 것, 편안한 신하를 멀리하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할 것, 사사로운 은혜를 절제하고 공도(公道)를 넓힐 것, 인재 선발을 정밀하게 하여 체통을 밝힐 것, 기강을 떨쳐 국속(國俗)을 진작시킬 것, 재용을 절약하여 방본(邦本)을 튼튼히 할 것, 세자 사부를 잘 선택하여 세자를 잘 보좌할 것, 정사를 잘 닦고 외적을 물리칠 것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유생[棄繻生]  기유생(棄繻生)은 유(繻)를 버린 선비라는 뜻으로, 즉 한(漢) 나라 종군(終軍)을 가리킨다. 종군이 약관(弱冠)에 제남(濟南)으로부터 박사관(博士館)으로 갈 적에 걸어서 관문(關門)에 들어서자 관리(關吏)가 종군에게 유를 주었다. 종군이 “이것이 무어냐?” 하고 묻자 관리가 “돌아올 때에 이것을 반납하여 부절에 맞추어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니, 종군이 “대장부가 서쪽에 나왔다가 출세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수 없다.” 하고는 그 유를 버리고 갔는데, 뒤에 종군이 알자(謁者 관명)가 되어 사행(使行) 자격으로 다시 이 관문으로 나가게 되자 관리가 말하기를 “이 사자(使者)가 바로 옛날에 유를 버리고 간 그 선비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卷64 終軍傳>

기유생[棄繻生]  명주 끈을 버린 선비. 한(漢)나라 종군(終軍)이 18세에 제남으로부터 박사제자(博士弟子)에 피선되어 도보로 관문(關門)에 들어가니, 관리(關吏)가 종군에게 유(繻)를 주었다. 종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뒷날에 관(關)을 나올 때에 유(繻)와 맞추어 보아야 한다.” 했다. 종군이 말하길 “대장부가 서쪽으로 가는데 출세하지 못하면 그냥 돌아갈 수 없다.” 하고 유(繻)를 버리고 갔다. 그 뒤에 과연 사자(使者)가 되어 절(節)을 가지고 관(關)을 나왔다 한다. 뒤에 소년이 뜻을 세운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 되었다. 유(繻)는 옛날 관문(關門)과 나루를 출입할 때에 쓰는 증빙물로 종이나 비단을 찢어서 그것을 나누어 출관(出關) 시에 취하여 합쳐 보고 이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기유유찰[己酉遺札]  윤선거(尹宣擧)가 현종(顯宗) 10년(1669)에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말하는데 그 내용에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윤선거가 남인(南人)의 일대(一隊)를 두려워하여 뒷날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이 편지로 송시열을 꾀려고 했었지만, 공의(公議)가 두려워 깊이 숨겨 둔 채 꺼내지 않았다. 이때 와서 그의 아들 윤증이 시사(時事)의 변동을 보고 아버지의 묘문(墓文)을 청하기 위해 꺼낸 것이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윤증이 이 편지를 내놓은 것은 실상 송시열을 격동시켜 이를 구실로 배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宋子大全隨箚 卷10>

기유음식 불여물식[器有飮食 不與勿食]  그릇에 음식(飮食)이 있더라도 주시지 않으면 먹지 않음. 사자소학(四字小學)에 “그릇에 음식이 있어도 주시지 않으면 먹지 말라. 만약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돌아가 부모님께 드려라.[器有飮食, 不與勿食. 若得美味, 歸獻父母.]”라고 보인다.

기유후생[棄繻後生]  한나라 종군(終軍)은 장안으로 가려고 함곡관을 들어서는데, 관을 지키던 관리가 종군에게 수(繻), 곧 비단으로 만든 일종의 통행증을 주자 “‘대장부가 사방을 유람함은 반드시 공명을 이루기 위함인데, 관을 나섬에 이 물건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하고는 수를 버리고 갔다. 종군은 장안에 들어가 알자가 되어서 명을 받들고 군국을 순행하게 되었는데, 부절을 들고 동으로 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을 지키던 관리가 그를 알아보더니 ‘이 사자는 바로 예전에 수를 버리고 떠난 후생이다!’라고 하였다.[‘大丈四遊, 必取功名, 出關何用此物!’ 棄繻而去. 終軍至長安為謁者, 受命巡行郡國, 持節東至函谷關. 關吏識之, 道: ‘此使者原是此前棄繻後生!’]”라고 하였다. <漢書 終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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