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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遷至藍關示姪孫湘좌천지남관시질손상 / 좌천길 남관이 눈에 막혀 / 韓愈한유


一封朝奏九重天[일봉조주구중천]   아침에 한 통 상소 조정에 올렸다가

夕貶潮州路八千[석폄조주로팔천]   저녁에 폄출되어 조주로 가는 팔천리길

欲爲聖明除弊事[욕위성명제폐사]   황제 성덕 위해 폐단 없애려 했을 뿐

肯將衰朽惜殘年[긍장쇠후석잔년]   노쇠한 몸 남은 생을 아껴서가 아니었네

雲橫秦嶺家何在[운횡진령가하재]   구름 진령에 비꼈는데 내 집은 어디인가

雪擁藍關馬不前[설옹남관마부전]   눈이 남관 가로막아 말이 가지 못하누나

知汝遠來應有意[지여원래응유의]   네가 멀리 온 것은 뜻이 있음을 아노니

好收吾骨瘴江邊[호수오골장강변]   장기 서린 강가에서 내 뼈 잘 거두어다오

<左遷至藍關示姪孫湘좌천지남관시질손상 / 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 질손 상에게 보이다 / 韓愈한유>

  한유(韓愈)의 질손(姪孫) 가운데 상(湘)이란 이가 있었는데, 한상(韓湘)은 자가 청부(淸夫)이고, 당나라 때의 장과(張果), 여동빈(呂洞賓) 등과 함께 전설상의 여덟 선인으로 일컬어진다. 한유가 일찍이 그에게 학문을 힘쓰라고 하자, 상이 웃으면서 “준순주를 만들 줄도 알거니와, 경각화도 피울 수가 있답니다.[解造逡巡酒, 能開頃刻花.]”라는 시구를 지어서 보여 주므로, 한유가 이르기를 “네가 어떻게 조화(造化)를 빼앗아서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자, 상이 이에 흙을 긁어모은 다음 동이로 그 흙을 덮어 놓았다가 한참 뒤에 동이를 들어내니, 거기에 과연 벽모란(碧牡丹) 두 송이가 피어 있었고, 그 모란 잎에는 “구름은 진령에 비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라는 시구가 작은 금자(金字)로 쓰여 있었다. 한유가 그 시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상이 말하기를 “오랜 뒤에 이 일을 증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한유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헌종(憲宗)의 진노를 사서 조주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가던 도중, 홀연 눈을 맞으며 따라온 질손(姪孫) 한상(韓湘)을 만났던바, 이때 상이 말하기를 “옛날 모란꽃 잎에 쓰인 시구의 뜻이 바로 오늘의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유가 지명(地名)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藍關)이라고 하므로, 마침내 그 시구의 뜻을 깨닫고 이 시를 지어 상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 한유[韓愈]  당(唐)나라의 사상가이며 문장가이자 정치가로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사람이다.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 뒤로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져 한창려(韓昌黎)라 칭하여졌다. 유학(儒學)을 옹호하고 불교(佛敎)를 배척하였으며, 헌종(憲宗)이 사리(舍利)를 궁중으로 들여오려 하자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법을 비판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육경(六經)과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위주로 하던 당시의 문풍(文風)을 바로잡고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주창하였다. 후에 송학(宋學)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백거이(白居易)와 더불어 중당(中唐)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한백(韓白)이라 일컬어지며, 성당(盛唐)의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유(韓愈)의 문하생(門下生)을 한문제자(漢門弟子)라 하며, 그 중에는 맹교(孟郊), 가도(賈島), 이하(李賀), 장적(張籍), 왕건(王建) 등 쟁쟁한 시인들이 많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 한유[韓愈]  당(唐)나라의 문장가이며 사상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한창려(韓昌黎)라고도 불린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형수에게 양육되었다. 792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을 지냈고 형부시랑(形部侍郞)으로 있을 때에 헌종(憲宗)이 불골(佛骨: 사리舍利)을 모시는 것을 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으며, 이듬해 헌종이 죽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그는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하는 변려문(騈儷文)에 반대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하여 후세 산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詩)에서 지적(知的)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하여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아울러 송대의 시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유가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으며, 특히 요(堯)·순(舜)에서 공(孔)·맹(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학문의 전통을 주장하여 송대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 한유[韓愈]  당 나라 헌종(憲宗)·목종(穆宗) 때 사람으로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다. 세 살 적에 고아가 되어 형수 정씨(鄭氏)에게서 양육되었는데, 뒤에 정씨가 죽자 기년복(朞年服)을 입음으로써 양육해 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25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당 헌종(唐憲宗)이 봉상부(鳳翔府) 법문사(法門寺)에 있던 불사리(佛舍利)를 대궐로 가져와 3일 동안 보관하다가 도성의 다른 절로 내보냈는데, 왕공(王公), 사인(士人)들이 너나없이 달려가 염불을 하고 보물을 가져다 바치느라 길이 미어질 정도였다. 이때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부처를 신봉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논했다가 헌종의 노여움을 사 남쪽 8000리 너머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침체기에 있던 유학(儒學)을 일으키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주역(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이에 그의 영향을 받은 송(宋)대의 유학자들이 성리학(性理學)의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하게 됨으로써, 한유(韓愈)는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한유[韓愈]  당(唐) 나라 때의 문장가, 철학가 및 사상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친을 잃은 뒤 세 살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떴다. 일곱 살에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열 세 살에 문장을 쓸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읽은 책이 만 권을 넘었다고 한다. 조상의 적을 창려(昌黎)에 둔 까닭에 자칭 창려한유(昌黎韓愈)라 했고, 사람들은 그를 한창려(韓昌黎)로 불렀다. 정원(貞元) 8년(792) 진사시에 급제한 뒤,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으나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했다가 양산현(陽山縣: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조정으로 돌아와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다가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819년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모신 것에 대해 간[諫迎佛骨表]하다가 조주(潮州: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사람들이 그를 한이부(韓吏部)라고 불렀다. 문학사적으로 꼽는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는데,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변문(騈文)에 반대하며 자유로운 형식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친구인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이끌었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하여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시(宋詩)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큰 것을 들 수 있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했으며, 송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소식(蘇軾)은 한유에 대해 “문장으로는 지난 8대(동한東漢, 위魏,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의 쇠락을 일으켰고, 도(道)로는 천하를 허우적거리는 데서 건져냈다.[文起八代之衰, 道濟天下之溺.]”고 그 공적을 치하했다. 그의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40권, 외집(外集) 10권, 유문(遺文) 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 남관[藍關]  진(秦)나라의 남전관(藍田關)의 준말로,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동남쪽에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유명한 곳이다.
  • 진령[秦嶺]  중국(中國) 섬서성(陝西省)의 남부(南部)에 있는 산(山)이다. 종남산(終南山)의 뒤쪽이며, 감숙성(甘肅省) 남부에서 시작하여 섬서성(陝西省)을 지나 하남성(河南省) 서쪽에 이르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의 중심부(中心部)를 이루고 있다.
  • 질손[姪孫]  형제(兄弟)의 손자(孫子). 종손(從孫).
  • 구중천[九重天]  가장 높은 하늘. 황제. 궁성. 제왕. 조정(朝廷). 아홉 방위(方位)의 하늘. 고대 중국에서 하늘을 아홉 방위(方位)로 나누어 이르던 말.
  • 상소[上疏]  왕에게 올리는 글. 왕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총칭하여 상주문(上奏文)이라고 하는데, 종류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상소는 상주문 중에서도 간언(諫言)이나 의견, 진정을 전달하는 글을 말한다. 짧은 상소를 차자(箚子)라고 하는데, 둘을 합해 소차(疏箚)라고 한다. 그밖에 진소(陳疏)·소장(疏章)·장소(章疏) 등의 여러 명칭이 있다. 계(啓)와 장계(狀啓)는 관리들이 올리는 보고서인데, 이것들도 때에 따라서는 상소의 역할을 한다. 상소 방법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봉사(封事)·봉장(封章)은 왕 이외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하여 올리는 상소로, 중국 한(漢)나라 때 검은 천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올리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폄출[貶黜]  벼슬을 빼앗겨 쫓겨나다. 다른 사람을 헐뜯어 벼슬을 빼앗고 물리침. 다른 사람의 인망을 깎아내려 배척함. 감출(減黜). 폄척(貶斥).
  • 성명[聖明]  임금의 총명(聰明). 고명(高明)한 군주(君主). 또는 임금의 높고 밝은 덕(德). 덕이 거룩하고 슬기가 밝음. 임금의 어질고 밝은 지혜.
  • 폐사[弊事]  폐해가 되는 일. 해롭거나 좋지 못한 일을 뜻한다.
  • 폐단[弊端]  어떤 행동이나 일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이나 해로운 요소.
  • 쇠후[衰朽]  쇠하여 낡음. 노쇠(老衰)함. 기운이나 힘 등이 줄어들어 약해짐. 낡아서 무너지거나 썩음. 쇠후하다. 쇠락하다. 쇠로하다.
  • 잔년[殘年]  죽기 전까지의 남은 생애. 늙어서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나머지 나이. 쇠잔해진 나이. 여년(餘年). 인생의 만년. 연말. 여생. 세밑.
  • 장강[瘴江]  장기(瘴氣=독기)가 자욱한 강. 풍토병(風土病)이나 전염병 같은 사나운 기운이 생기는 강(江). 독기 서린 강가라는 뜻으로, 주로 유배지의 습한 풍토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 풍토병. 장독(瘴毒). 더운 지방의 습열장독(濕熱瘴毒)을 감수하여 발생하는 온병(溫病)의 하나이다.

한유韓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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