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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첩경[南山捷徑]~남산축수[南山祝壽]~남산취라[男山吹螺]


남산찬[南山粲]  영척(寧戚)이 부른 반우가(飯牛歌)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 뜻을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반우가(飯牛歌)를 가리키기도 한다. 반우가는 일반적으로 영척가(甯戚歌)로 불리워진다. 그 내용은 “남산은 깨끗하고, 흰 돌은 눈부시네. 요순이 선양하던 시절을 못 만나니, 단포 단의가 정강이뼈까지 이르렀네. 저물녘부터 한밤중까지 소에게 꼴 먹이니, 길고 긴 밤 언제 가고 아침이 오려나.[南山粲 白石爛 生不遭堯與舜禪 短布單衣適至骭 從昏飯牛薄夜半 長夜曼曼何時旦]”이다. 남산안(南山矸)이라고도 한 곳도 있다.

남산첩경[南山捷逕]  종남첩경(終南捷逕)과 같은 뜻으로, 당(唐)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이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한 뒤에 뜻대로 벼슬길이 트이지 않자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였는데, 종남산은 장안 가까이에 있어 소문이 궁중에 쉽게 전해지는 까닭에 오히려 소명(召命)을 받아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종남산에 은거하는 것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지름길이다.[終南捷徑]”라는 말이 생겼다. <新唐書 卷123 盧藏用列傳>

남산첩경[南山捷徑]  남산(南山)은 중국 장안(長安)의 앞산인 종남산(終南山)을 가리킨다. 당(唐)나라의 노장용(盧藏用)이 진사(進士)에 급제한 뒤 등용되지 않자, 도성에서 가까운 종남산에 은둔하였다. 이는 군주가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주기를 바라서였다. 그 후 그가 과연 은사(隱士)라는 명성으로 등용되었다. 사마승정(司馬承禎)이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가니, 노장용이 종남산을 가리키면서 “여기에도 아름다운 운치가 있는데 굳이 천태산을 찾을 것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승정이 웃으며 “내가 보기에 종남산은 벼슬의 첩경일 뿐일세.[在我看來, 終南山只不過是做官的捷徑而已.]”라고 하니, 노장용이 부끄러워하였다. <新唐書 卷196 司馬承禎傳>

남산축수[南山祝壽]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당신은 둥그러져 가는 초승달 같고, 막 떠오르는 태양 같으며, 영원한 남산과 같아서, 이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며, 무성한 송백과 같아서, 당신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이가 없도다.[如月之恒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원래는 국가의 기업(基業)이 장구하여 공고함을 기원하는 내용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말로 쓰인다.

남산취라[男山吹螺]  남산은 개성부에서 동쪽으로 2리에 있는 산이다. 이성계(李成桂)가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들어올 때 조민수는 최영(崔瑩)의 군사에게 패하였으나, 이성계가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에 오르니 최영 휘하에 있던 안소(安沼)가 남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大螺]를 한 번 불었다. 이때 행군하던 여러 군대들은 모두 각(角)을 불었는데도 유독 이성계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다. 도성 사람이 소라 소리를 듣고는 모두 이성계의 군사라는 것을 알았다. 이성계가 화원(花園)을 수백 겹이나 포위하고서 우왕(禑王)과 최영을 포로로 잡은 다음 최영을 고봉현(高峯縣)에 유배하였다. <太祖實錄 總敍>

남산치[南山觶]  남산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며 술잔을 든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천보(天保)의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남산이 장구한 것처럼 이지러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말기를.[如月之恒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이라는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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