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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폐구[南山敝苟]~남산헌수[南山獻壽]~남산현표[南山玄豹]


남산편[南山篇]  소의 뿔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반우가(飯牛歌)라고도 하는 이 노래는 위나라 사람인 영척(甯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벼슬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이 기르던 소를 몰고 가 제 환공의 수레 밑에서 소의 뿔을 두드리며 불렀던 노래이다. 모두 3수이다. <古詩賞析 卷1 周詩>

남산폐구[南山敝苟]  모서(毛序)에서, 남산(南山)은 양공(襄公)을 풍자한 시로서 양공이 그 누이와 간음하니, 대부가 이러한 악행(惡行)을 보고서 시를 지어 풍자한 것이라고 하였고, 폐구(敝苟)은 문강(文姜)을 풍자한 시로서 제(齊) 나라 사람들이 노(魯) 나라 환공(桓公)이 미약하여 문강을 막고 제어하지 못하여 두 나라의 병폐가 되게 한 것을 미워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사이에 있는 보전(甫田)을 대부가 양공을 풍자한 시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산표[南山豹]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현명(賢明) 도답자처(陶答子妻)에 “도답자(陶答子)가 도(陶) 땅을 다스린 지 3년에, 명예는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안은 3배나 더 부유하게 되자, 그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듣건대 남산(南山)에 현표(玄豹)가 있는데, 안개비가 내리는 7일 동안 먹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문장(文章)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숨어 화를 멀리하는 것이다. 개나 돼지는 먹이를 가리지 않고 그 몸을 비만하게 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반드시 죽게 될 뿐입니다.[妾聞南山有玄豹 霧雨七日而不下食者 何也 欲以澤其毛而成文章也 故藏而遠害 犬彘不擇食以肥其身 坐而須死耳]’라고 하였다.”라고 보인다. 남산현표(南山玄豹).

남산풍발발[南山風發發]  효성을 다 바치지 못하는 자식의 심경을 표현한 말이다. 어버이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효자의 심정을 읊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남산은 높다랗고, 회오리바람은 거세도다. 사람들 모두 잘 지내는데, 나만 왜 해를 입나.[南山烈烈 飄風發發 民莫不穀 我獨何害]”라고 하였다.

남산헌수[南山獻壽]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당신은 둥글어 가는 초생달 같고, 막 떠오르는 태양 같으며, 영원한 남산과 같아서, 이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며, 무성한 송백과 같아서, 당신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이가 없도다.[如月之恒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흔히 임금이나 웃어른에게 축복하는 말로 쓰인다.

남산현표[南山玄豹]  서주(西周) 때 도(陶) 땅의 대부(大夫) 답자(答子)가 3년 동안 도 땅을 다스렸으나 명예는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안만 세 배로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답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들으니 남산에 검은 표범이 있는데 안개비 속에서 이레 동안이나 가만히 있으면서 산을 내려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문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나지 않아야 해를 멀리 할 수 있는 법이니, 개나 돼지도 먹을 것을 가리지 않고 제 살만 찌우면 앉은 자리에서 잡아먹힐 뿐입니다.[妾聞南山有玄豹, 霧雨七日而不下食者, 何也? 欲以澤其毛而成文章也. 故藏而遠害, 犬彘不擇食以肥其身, 坐而須死耳.]”라고 하였다. 이에 그 시어머니가 노하여 답자의 아내를 내쳐버렸는데, 과연 1년 만에 도적이 들어 주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표은(豹隱)’ 또는 ‘남산무표(南山霧豹)’라 하여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고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몸을 깨끗이 닦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이 고사를 원용하여 한 말이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남산호[南山皓]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선인을 가리킨다. 상산(商山)이 종남산(終南山)의 남쪽의 지맥이라 남산호(南山皓)라고 한 것이다. 이백(李白)의 시 ‘금릉가, 송별범선(金陵歌, 送別范宣)’에 “장강 만 리 한 맘으로 그대 보냈지만, 다음에 남산으로 그대 보러 찾아가리.[送爾長江萬里心, 他年來訪南山皓]”라고 하였다. 상산사호(商山四皓)는 줄여서 사호(四皓)라고도 부르며 진(秦)나라 말기의 은사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甪里) 4명이 난세를 피해 상산에 은거하여 버섯 등을 따 배를 채우며 지냈는데, 네 사람 모두 팔십을 넘긴 나이로 수염과 머리가 하얗대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들을 상산사호라고 불렀다. 이들은 스스로 자지가(紫芝歌)라는 이름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동원공(東園公)은 성이 당(唐)이고 이름은 병(秉)이며 자는 선명(宣明)이다.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서산도(西山島) 서북쪽에 있는 봉황산(鳳凰山) 남쪽에 일동촌(一東村)이 있는데, 동원공이라는 호칭은 이곳에 은거한 것에 연유하여 생겼다. 마을에서는 동원공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 사당의 문루 정면에는 동원공사(東園公祠)라고 쓰여있고, 안쪽에는 상산영수(商山領袖)라는 가로 판액이 걸려있다. 하황공(夏黃公)은 성이 최(崔), 이름은 광(廣)이며 자는 소통(少通)이다. 기리계(綺里季)는 성이 오(吳), 이름은 실(實), 자는 자경(子景)이다. 녹리선생(甪里先生)은 각리선생(角里先生)이라고도 하는데, 성이 주(周), 이름은 술(術)이며 자는 원도(元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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