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노관[盧綰]~노관[老關]~노관인일[撈管認日]


노관[盧綰]  패국(沛國) 풍현(豊縣) 사람이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동향인으로 유방과 생년월일이 똑같았으며 포의(布衣) 때부터 절친하게 지내면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초(楚)・한(漢) 전쟁 때 태위(太尉)가 되었고 장안후(長安侯)에 봉해졌다. 뒤에 유가(劉賈)와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격멸하고 유방을 따라 연왕(燕王) 장도(藏荼)를 격파하여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고제(高帝) 12년(기원전 195)에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고 흉노(匈奴)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방해하려다가 도리어 흉노와의 연대를 도왔는데, 뒤에 이 일이 알려지자 번쾌(樊噲)의 공격을 받고 흉노로 도망하였다. 흉노가 동호로왕(東胡盧王)으로 삼았으나 1년여 만에 흉노에서 죽었다. <漢書 卷34><史記 卷93>

노관[盧綰]  패군(沛郡) 풍읍(豐邑) 사람으로,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마을의 절친한 벗이다. 노관의 부친과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부친인 태상황과는 매우 친한 친구였다. 태상황이 한고조를 낳자 그 부친도 노관을 낳았다. 한고조와 노관은 같은 날에 태어나서 동무하여 같이 자랐다. 고조가 패에서 궐기할 때 노관은 객의 자격으로 종사했다. 고조가 항우를 파하고 한나라를 세우자 노관은 장안후가 되었다. 이어서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한나라에 투항하자 그 빈자리에 노관이 봉해졌다. 이어서 한고조와 여후(呂后)가 유씨(劉氏)가 아닌 공신들로서 제후에 봉해진 사람들을 차례로 주살하자 노관도 위협을 느끼고 황제에게 조현을 드리러 가지 않았다. 한고조는 번쾌(樊噲)를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노관은 가솔들을 거느리고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한 혜제(漢惠帝) 원년(기원전 194)에 63세의 나이로 흉노에서 죽었다.

노관[老關]  후량(後梁) 관동(關同)은 산수도(山水圖)의 명가(名家)로 추산한림도(秋山寒林圖)가 있다.

노관인일[撈管認日]  피리를 잡고 태양이라 함. 이는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면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일유(日喩)에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어떤 사람이 태양을 알지 못하여 눈이 성한 사람에게 태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한 사람이 태양의 모양은 구리 쟁반처럼 생겼다고 대답하며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들려주자, 맹인은 훗날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태양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사람이 태양의 빛은 촛불처럼 밝다고 대답하며 초를 만져 그 모양을 알려 주자, 맹인은 훗날 피리를 만지면서 그것이 태양이라고 생각하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東坡全集 卷100 日喩>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