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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복명소[奴僕命騷]~노복생아[蘆菔生兒]~노봉불거[老鳳不去]


노복[蘆菔]  무. 무 뿌리. 나복(蘿葍). 소식의 시 힐채(擷菜)에 “가을이라 서리 이슬이 동원에 가득한데, 무는 아이를 낳고 겨자는 손자를 두었네.[秋來霜露滿東園 蘆菔生兒芥有孫]”라는 말이 있다.

노복[勞復]  큰 병이 나은 후에 노동을 과도하게 해서 병이 다시 도진 것을 말한다.

노복명소[奴僕命騷]  당나라 두목(杜牧)의 이장길가시원서(李長吉歌詩原序)에 “이하가 스물일곱 살에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이하가 죽지 않고 조금 더 문장을 익혔다면 이소(離騷)를 종처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賀生二十七年死矣, 世皆曰: 使賀且未死, 少加以理, 奴僕命騷, 可也.]”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노복생아[蘆菔生兒]  동파(東坡) 소식의 시 힐채(擷菜)에 “가을이라 서리 이슬이 동원에 가득한데, 무는 아이를 낳고 겨자는 손자를 두었네.[秋來霜露滿東園 蘆菔生兒芥有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복(蘆菔)이나 나복(蘿蔔)은 모두 무를 가리킨다.

노복생아개유손[蘆菔生兒芥有孫]  소식(蘇軾)의 ‘나물을 뜯으며[擷菜]’에 “가을 되어 서리와 이슬이 동쪽 동산에 가득하니, 무 뿌리 실해지고 겨자 싹이 돋았어라.[秋來霜露滿東園, 蘆菔生兒芥有孫]”라고 한 데서 그대로 따온 표현이다. <蘇東坡詩集 卷40>

노복파[老伏波]  동한(東漢)의 마원(馬援)은, 전공(戰功)으로 복파장군(伏波將軍)에 봉(封)해졌다. 그는 예순두 살 나이에도 의기양양하여, 어느 때든지 싸움터로 나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노봉[老鳳]  명(明)나라 양신(楊愼)의 소봉소의(小鳳小儀)에 따르면 당나라 사람들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소봉(小鳳)이라 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대봉(大鳳)이라 하며, 승상(丞相)을 노봉(老鳳)이라 했는데 중서성(中書省)에 봉지(鳳池)가 있기 때문이다.

노봉[爐峰]  여산(廬山)의 주봉인 향로봉(香爐峯)의 약칭이다. 백거이의 시 제별유애초당겸정이십사군(題別遺愛草堂兼呈李十使君)에 “일찍이 향로봉 아래 살고 있을 때, 서재에서 약대를 볼 수 있었네.[曾住爐峰下 書堂對藥台]”라고 하였다.

노봉구[蘆峰口]  저자 미상의 연행기(燕行記)인 계산기정(薊山紀程)에 “노봉구는 십리대보에서 5리 되는 지점에 있다. 산이 끊어져 길이 되었는데, 남쪽과 북쪽은 다 높은 산봉우리여서, 길이 점점 돌이 많아진다. 이는 창려현을 빠져나가는 산협이다. 음마하를 지나서 배음보가 있고 또 8리를 가면 쌍망보에 도달한다. 쌍망보에는 성이 있고 성 동쪽에는 돌다리 둘이 있다.[在十里臺堡五里地 山斷爲路 南北皆高峰 路漸磽确 蓋昌黎縣過峽也 歷飮馬河而有背陰堡 又八里而至雙望堡 堡有城 城東有二石橋]”라고 하였다.

노봉불거[老鳳不去]  송(宋)나라의 증공량(曾公亮)은 인종(仁宗) 가우(嘉祐) 연간부터 신종(神宗) 희녕(熙寧) 연간까지 중서성(中書省)에 재직하며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의 권세가 워낙 대단하여 간관들조차 이에 대해 비판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이복규(李復圭)가 “늙은 봉황새 연못가에서 웅크린 채 떠나지 않고, 굶주린 까마귀는 어사대(御史臺) 위에서 입 다문 채 울지 않네.[老鳳池邊蹲不去 飢烏臺上噤無聲]”라는 시를 지어 기롱하자, 증공량은 어쩔 수 없이 관직을 사양하였다. <宋名臣言行錄後集 卷6 曾公亮魯國宣靖公> 늙은 봉황새는 늙은 재상을, 굶주린 까마귀는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어사대의 관리를 가리키는바, 중서성이 봉황지(鳳凰池) 옆에 있어 봉각(鳳閣)이라 칭하고 어사대를 오대(烏臺)라 칭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하여 조롱한 것이다.

노봉협처[路逢狹處]  길가다 좁은 곳에서 만나다. 외나무다리 같은 좁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 경행록(景行錄)에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느 곳에 살든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회피하기 어렵다.[恩義廣施 人生何處不相逢 讐怨莫結 路逢狹處難回避]”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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