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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爐竈]~노조린[盧照隣]~노종[露蹤]~노종희[露終晞]


노조[爐竈]  부뚜막.

노조[路朝]  고대에 천자와 제후는 노침(路寢)에서 조회를 보았으니, 노침이 정청(正廳: 임금이 국정을 처리하는 중심 청사)이었다. 노조는 ‘노침의 조회석’이라는 말이다.

노조린[盧照隣]  초당기(初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승지(升之)이고 호는 유우자(幽憂子)이며 유주(幽州) 범양(範陽) 사람이다. 명망가에서 태어나 왕부전첨(王府典簽), 익주신도위(益州新都尉)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의사이자 도사였던 손사막(孫思邈)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도 의술을 생업으로 삼았다. 왕발(王勃), 양형(楊炯), 낙빈왕(駱賓王)과 더불어 왕양노락(王楊盧駱), 혹은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렸다. 그는 풍병(風病)이 걸려 수족이 마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구자산(具茨山)에 은거하며 오비문(五悲文)을 지어 자신을 한탄하다가 끝내는 영수(穎水)에 투신자살하였다. 저서로 노승지집(盧升之集)이 있고, 명(明) 나라 때 장섭(張燮)이 편집한 유우자집(幽憂子集)이 전한다. 당서(唐書) 왕발전(王勃傳)에 “왕발이 양형(楊炯)・노조린・낙빈왕(駱賓王)과 더불어 문장(文章)으로써 명성이 같으니, 천하 사람들이 왕(王)・양(楊)・노(盧)・낙(駱) 사걸(四傑)이라고 일컬었다. 형(炯)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노조린의 앞에 있기 부끄럽고 왕발의 뒤에 있기 부끄러워한다.[吾愧在盧前, 耻居王後.]’라고 하니 평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였다.”고 한다.

노조린[盧照隣]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으나, 20대 중반에 악질(惡疾)에 걸려 사천성(四川省) 신도(新都)의 위(尉)를 물러나 각지를 전전하며 투병생활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효험이 없자 물에 빠져 자살하였다. 왕발(王勃)・양형(楊炯)・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나라 초당사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시인으로, 당시선(唐詩選)에 있는 장대한 칠언가행 장안고의(長安古意)가 특히 유명하다.

노조상[盧祖尙]  당나라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이다. 628년 교주 도독(交州都督)에 제수되자 처음에는 받아들였으나 곧 후회하여 숙환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거듭 설득했는데도 노조상이 계속 사양하자 당태종(唐太宗)은 크게 노하여 “내가 사람을 부리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는가.”라 하고는 조정에서 즉시 참수하였다. <舊唐書 卷69 盧祖尙列傳>

노조언[老祖言]  노조는 도교(道敎)의 조사(祖師)에 대한 존칭으로, 본디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가리킨다.

노조왕[虜趙王]  진 시황(秦始皇) 19년 진(秦)은 조(趙)를 멸하고 조왕(趙王) 천(遷)을 사로잡았다. 천(遷)의 형인 공자(公子) 가(嘉)가 자립하여 대왕(代王)이 되어 계속 항거하다 6년 만에 결국 망하였다.

노종[露蹤]  행색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어사(御史) 출두(出頭)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 시대, 암행어사가 지방관아에 가서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신분을 밝히고 사무를 처리하던 일을 이른다.

노종도[魯宗道]  송(宋)나라 초현(譙縣) 사람으로 자는 관지(貫之), 호는 퇴사암(退思巖),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벼슬은 해염령(海鹽令)・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해염령 때 고을 동남항(東南港)이 인몰된 것을 다시 준설하여 백성들은 그 항구를 노공포(魯公浦)라 불렀다. <宋史 卷286>

노종희[露終晞]  노종희(露終晞)는 이슬이 말랐다는 말로, 죽음을 의미한다. 한 고조(漢高祖)에게 반기를 들다 패망한 전횡(田橫)의 죽음을 두고, 그 무리가 지은 만가 2장 중 1장에 “부추 위에 맺힌 이슬 어이 쉽게 마르나. 이슬은 말라도 내일이면 다시 내리지만, 사람은 죽어 한번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薤上朝露何易晞, 露晞明朝更復落, 人死一去何時歸.]”라고 하였다. <古今注 音樂>

노좌[路左]  길이 외짐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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