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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둔[東屯], 동둔무사객[東屯無事客], 동득백리해[東得百里奚], 동등[冬等]


동둔[東屯]  황계(黃溪) 가의 한 촌락이다. 유종원(柳宗元)의 유황계기(游黃溪記)에 “영주(永州)의 관아를 둘러싼 백 리 안에서 북쪽으로 오계(浯溪), 서쪽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 남쪽으로 농천(瀧泉), 동쪽으로 황계(黃溪)와 동둔(東屯)까지는 이 중간에 산수로 이름난 마을이 백여 개나 되는데, 그중에 황계(黃溪)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황계(黃溪)는 영주(永州) 관아까지의 거리가 70리이다. 동둔(東屯)에서 남쪽으로 600보를 가면 황신사(黃神祠)에 도달한다.[環永之治百里, 北至于浯溪, 西至于湘之源, 南至于瀧泉, 東至于黃溪東屯, 其間名山水而村者, 以百數, 黃溪最善. 黃溪距州治七十里, 由東屯南行六百步, 至黃神祠.]”라고 하였다.

동둔[東屯]  두보(杜甫)의 시 자양서형비차이거동둔모옥(自瀼西荊扉且移居東屯茅屋)에 “동둔에서 다시 양서로, 한결같이 시냇가에 머물다 보니, 오거나 가거나 모두가 띳집인데, 머무름은 농사를 짓기 위함일세.[東屯復瀼西, 一種住淸溪. 來往皆茅屋, 淹留爲稻畦.]”라고 하였다. 동둔은 두보가 56세 때 머물던 기주(夔州)의 지역 이름이다. <杜少陵詩集 卷20 自瀼西荊扉且移居東屯茅屋>

동둔무사객[東屯無事客]  두보(杜甫)가 파촉(巴蜀)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한가로이 보낸 것처럼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기주가(夔州歌)에 “동둔의 벼논 백경에, 북쪽 계곡물을 끌어 푸른 모를 적시네.[東屯稻畦一百頃 北有澗水通靑苗]”라고 하였고, 행궁장망보도휴수귀(行宮張望補稻畦水歸)에 “동둔은 큰 강이 북쪽에 있어, 백경의 논 평평하기 소반과 같네.[東屯大江北 百頃平若案]”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5 夔州歌 6, 卷19 行宮張望補稻畦水歸>

동득백리해어완[東得百里奚於宛]  통감절요(通鑑節要) 권2 후진기(後秦紀)에 “옛날 목공(穆公)은 선비를 구하여 서쪽으로 유여(由余)를 융(戎)에서 취하고, 동쪽으로 백리해(百里奚)를 완(宛)에서 얻고, 건숙(蹇叔)을 송(宋)나라에서 맞이하고,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진(晉)나라에서 구하여 20개국을 겸병해서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昔者繆公求士, 西取由余於戎, 東得百里奚於宛, 迎蹇叔於宋, 來邳豹·公孫支於晉, 此五子者, 不産於秦. 而繆公用之, 幷國二十, 遂霸西戎.]”라고 한 데서 보인다. 백리해(百里奚)는 초(楚)나라 완(宛) 땅 사람으로 우(虞)나라에 벼슬하여 대부(大夫)가 되었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우(虞)나라를 멸하고 그를 포로로 데리고 가서 자기 딸의 잉신(媵臣)으로 삼으려 하자, 백리해(百里奚)는 이것을 부끄러워하여 완(宛) 땅으로 도망하였다가 초(楚)나라 사람에게 잡혔다. 뒤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재물로 속량시키고자 하였으나 초(楚)나라 사람이 내놓지 않을까 염려하여 마침내 다섯 마리의 검은 양가죽을 주고 백리해(百里奚)를 데려다가 국정(國政)을 맡겼는데, 재상이 된 지 7년 만에 진(秦)나라가 마침내 패자(霸者)가 되었다.

동등[冬等]  등급을 춘하 추동의 넷으로 나눴을 때의 네째 등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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