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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東銘], 동명[東溟], 동명기[洞冥記], 동명사[東明祠]


동명[東銘]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가 자신의 서재 동쪽 창 아래에 걸어 놓고 제생(諸生)들을 경계하였던 잠명(箴銘)이다. 장재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본래는 폄우(砭愚)와 정완(訂頑)이라는 제목의 글로, 뒤에 논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 정자(程子)의 말에 따라 폄우를 동명(東銘)으로, 정완을 서명(西銘)으로 개칭하였다. 동명은 일상에서 스스로 생각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로하려는 자기 성찰을 중시하는 내용으로 서술되었다. 이 외에도 서명(西銘), 정몽(正蒙), 횡거역설(橫渠易說), 경학이굴(經學理窟) 등의 저서가 있다. 동명(東銘) 첫머리에 “장난하는 말도 생각 속에서 나온 것이요, 장난하는 행동도 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戲言出於思也 戲動作於謀也]”라는 말이 나온다.

동명[東銘]  송(宋)나라 철학자 장재(張載)가 그 학당(學堂)의 동쪽 창에 써 두었다는 명(銘)으로 서쪽 창에는 서명(西銘)이 있었다. 원래 동명(東銘)은 폄우(砭愚), 서명은 정완(訂頑)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름이 논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정이(程頤)의 말에 따라 동명과 서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張子全書 卷15 附錄> 처음에 동명(東銘)을 폄우(砭愚)라고 이름 한 것은, 침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을 폄(砭)이라고 이르는 바, 이 명(銘)으로 어리석은 병통을 치료하기 때문에 폄우(砭愚)라고 한 것이다. 또 서명(西銘)을 정완(訂頑: 증완證頑)이라 하였으니, 완악함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완(訂頑)은 인(仁)의 체(體)를 밝히고, 폄우(砭愚)는 지(智)의 술(術: 방법)을 밝혔다. 그런데 이천(伊川)이 이러한 명칭을 보고 “이는 논쟁의 단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자, 횡거(橫渠)는 마침내 서명(西銘)과 동명(東銘)으로 이름을 고쳤으니, 이 명문(銘文)을 동쪽과 서쪽 벽에 걸어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칭한 것이다.

동명[東明]  신이경(神異經)에 보이는 궁전으로 그 위치가 동쪽임으로 해서 동궁(東宮)을 뜻하게 되었다.

동명[東溟]  동해(東海). 동쪽에 있는 바다. 이백(李白)의 시 고풍11(古風11)에 “황하는 동쪽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한낮은 해는 서쪽 바다로 떨어진다.[黃河走東溟 白日落西海]”라고 하였다.

동명기(洞冥記]  전체 제목은 한무제별국동명기(漢武帝別國洞冥記)이다. 후한 곽헌(郭憲)이 편찬한 지괴소설집으로 알려져 있다.

동명노생[東溟魯生]  노생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이다. 연(燕) 나라 장수가 요성(聊城)을 점거하여 제 나라가 1년 동안 공격을 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중련이 연 나라 장수에게 글을 보내 결국 항복을 받았는데, 제 나라 왕이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동해의 해변으로 도망가 숨었다 한다. <戰國策 卷20 趙 3>

동명사[東明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東明王)을 모신 사당으로, 평양 성 기자사(箕子祠) 옆에 있다. 단군사(檀君祠)와 같은 사우(祠宇)에 있는데, 동명사는 동쪽, 단군사는 서쪽에 위치한다. 세종(世宗) 11년(1429)에 처음 건립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平壤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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