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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벽부도[東祠躄浮屠], 동사벽자[東祠躄者], 동사보유[東史補遺], 동사부[東槎賦]


동사백[董思白]  명 나라 동기창(董其昌)을 이른다.

동사벽부도[東寺躄浮屠]  당나라 문인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기폐답(起廢答)에 폐기되었다가 다시 쓰인 예 두 가지를 들었는데, 그 하나가 동사(東祠)의 앉은뱅이 중이었다. 앉은뱅이 중은 도는 있는데 몸이 성치 않아 버림받았다가 뒤에 스승 삼을 자가 없는 초학자나 여승들의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文章辨體彙選 卷443>

동사벽부도[東祠躄浮屠]  동사(東祠)의 앉은뱅이 중.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기폐답(起廢答)에 나오는 말이다. 유종원이 우계(愚溪)를 거닐고 있을 때 그 지방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앞으로 와서 “우리 고을에 폐기되었다가 일어난 예가 둘 있으니 힘내라.[今茲是州, 起廢者二焉, 先生其聞而知之歟.]”는 요지의 말을 하며 위로하였다. 유종원이 누구냐고 묻자 그들이 “동사의 벽부도와 마구간의 이마가 병든 말[東祠躄浮圖 中廏病顙之駒]”이라고 대답하였다. 한 고장의 승려들의 모임에는 반드시 스승의 자리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잘나고 훌륭한 승려는 모두 딴 고장으로 가고, 어릴 적에 병을 앓아 앉은뱅이가 된 벽부도(躄浮圖)만이 10년 동안 동사(東祠)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장의 젊은 승려들이 스승으로 모실 사람이 없어 마침내 벽부도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였다. 또 마구간에 이마가 병든 말이 있었는데, 다른 건강한 말들은 모두 일찍 조발되어 뽑혀나가고 병든 말만 계속하여 홀로 남았다. 그런데 새로운 자사가 부임하자 자사를 태울 말이 없어 홀로 남은 병든 말이 자사의 말로 뽑혀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記簒淵海 卷36 起廢>

동사벽자[東祠躄者]  동사(東祠)의 앉은뱅이 중.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기폐답(起廢答)에 나오는 말이다. 동쪽의 절에 사는 앉은뱅이 중이 학식은 있는데 몸이 성치 않아 버림받았는데, 뒤에 그 절에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게 되자 초학자나 여승들이 앉은뱅이 중을 스승으로 받들고 존경했다고 한다.

동사보유[東史補遺]  1630년(인조8) 전후에 조정(趙挺, 1551~1629)이 지은 역사책으로,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단군 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1646년에 아들 조유도(趙有道)가 4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동사부[東槎賦]  사행(使行) 길에 지은 시를 말한다. 중종 16년(1521)에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조선에 왔을 때 우리측의 접반사 이행(李荇), 종사관 정사룡(鄭士龍)·소세양(蘇世讓) 등 당대의 저명한 시인들과 서로 많은 시를 수답하였는데,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 시들을 묶어 동사집(東槎集)이라 이름한 데서 나온 말이다. <稗官雜記 卷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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