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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川田家위천전가 / 농촌풍경 / 王維왕유


斜光照墟落[사광조허락]   기우는 저녁 빛이 시골마을 비추니

窮巷牛羊歸[궁항우양귀]   좁은 골목으로 소와 양이 돌아오고

野老念牧童[야로념목동]   시골집 노인은 어린 목동 염려되어

倚杖候荊扉[의장후형비]   지팡이 짚고 서 사립문에 기다리네

雉雊麥苗秀[치구맥묘수]   꿩 울음소리에 보리순이 자라 패고

蠶眠桑葉稀[잠면상엽희]   누에가 잠들 때라 뽕잎이 드물어라

田夫荷鋤立[전부하서입]   돌아오던 농부는 괭이를 메고 서서

相見語依依[상견어의의]   오가는 이야기에 헤어질 줄 모르니

卽此羨閑逸[즉차선한일]   평화롭고 한가로운 이 풍경 부러워

悵然歌式微[창연가식미]   서글픈 마음에 식미의 노래 부르네

<渭川田家위천전가 / 위천의 농가 / 王維왕유>


  • 왕유[王維]  성당(盛唐)의 대표적 시인.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의 최고 시인이었다. 산서성(山西省) 기현인(祁縣人)으로 자(字)는 마힐(摩詰)이다. 서화와 음악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중국 자연시인의 대표로 꼽히며 남종화의 창시자로 불린다. 만년에 장안의 남쪽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망천(輞川) 별장에 은거하며 역관역은(亦官亦隱)의 거사적 삶을 살았다. 그의 시는 명정청신(明淨淸新)하고 정미아치(精美雅致)하며 초속탈진(超俗脫塵)하다. 객관적이고 고요한 서경(敍景)뿐만 아니라 송별시·궁정시 분야에서도 뛰어났다. 이백(李白)·두보(杜甫)와 함께 당나라의 대시인이었고,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로 칭하며 불교에 심취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시불(詩佛)이라고 일컬어진다.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을 때 죽었기 때문에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린다. 소식(蘇軾)은 당대(唐代) 산수전원시파(山水田園詩派)를 대표하는 그에 대해 “마힐의 시를 음미하다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다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고 하였다. 산수시(山水詩)에서 큰 성취를 보여 맹호연(孟浩然)과 병칭하여 왕맹(王孟)이라 일컬어진다. 저서로 왕우승집(王右丞集) 10권이 있다. 구당서(舊唐書) 왕유전(王維傳)에 “왕유는 형제가 모두 부처를 받들었고, 언제나 채식을 했으며 매운 것과 육식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오랫동안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살았으며 무늬나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維兄弟俱奉佛, 居常蔬食, 不茹葷血, 晩年長齋, 不衣紋彩.]”고 기록되어 있다.
  • 허락[墟落]  촌락.
  • 궁항[窮巷]  으슥하고 좁고 쓸쓸한 골목. 외딴 촌구석. 궁한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형비[荊扉]  가시 나무로 짜 만든 문짝. 조잡(粗雜)하고 허름하게 만든 문짝.
  • 의의[依依]  헤어지기 서운함. 아쉬워하는 모양. 섭섭해하는 모양. 바람에 가볍고 부드럽게 한들거리는 모양.
  • 식미[式微]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약소국인 여(黎)나라 임금이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위(衛)나라에 가서 구원을 기다리며 오래도록 무료한 세월을 보냈으나, 위나라에서는 군사를 풀어 여나라를 찾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에 그 시종신(侍從臣)들이 임금에게 돌아갈 것을 권고하여 부른 노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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