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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가[劍歌]~검각명[劍閣銘]~검각촉도[劍閣蜀道]


검가[劍歌]  자신의 울울한 처지에 불만을 품고 칼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전국 시대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인 풍환(馮驩)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칼을 두드리면서 노래하기를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밥을 먹음에 생선이 없구나.”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문을 나섬에 수레가 없구나.”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편안히 지낼 집이 없구나.” 하였다 한다. <戰國策 齊策>

검가[劍歌]  칼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추천하는 노래이다. 사기(史記) 권7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제(齊)나라 사람 풍환(馮驩)이 맹상군의 식객이 되어 뜻을 얻지 못하자 기둥에 기대 칼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장검(長劍)아 돌아가자꾸나, 밥상에 고기가 없도다.……장검아 돌아가자꾸나, 나갈 때 수레가 없도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검각[劍閣]  검각은 사천(四川)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의 이름이다. 사천과 섬서(陝西)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촉(西蜀)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예로부터 험준한 요해지로서 유명하였다.

검각[劍閣]  검각은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에 있는 관문 이름이다. 이 관문은 장안(長安)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특히 검각현 북쪽의 험준한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는 잔교(棧橋)가 있는 요해처(要害處)로 유명하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당하여 검각(劒閣)을 넘어서 촉(蜀) 땅으로 피한 고사가 있다.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는 구절이 있다.

검각[劍閣]  잔교(棧橋) 이름이다. 지금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제갈량(諸葛亮)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천협(川陜)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새지이다. <元和郡縣志 劍閣道>

검각[劍閣]  지명(地名)으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북쪽을 말한다.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을 이어주는 잔도(棧道)로 검각잔도(劍閣棧道)라고도 한다.

검각명[劍閣銘]  진(晉)나라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 장수(張收)를 따라 험준한 검각(劍閣)을 통해 촉으로 들어가서 지은 글인데, 익주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위에 아뢰니 세조(世祖)가 사신을 보내 돌에 새기게 했다고 한다.

검각지서[劍閣之西]  당명황은 마침내 나라에 난이 나서 촉중(蜀中)의 검각산(劒閣山) 서쪽으로 도망하였다.

검각촉도[劍閣蜀道]  검각은 중국 촉(蜀) 땅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의 요해(要害)이며, 촉도 역시 촉 땅으로 가는 길에 있는 험준하기로 이름난 잔도(棧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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