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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록성경[劍錄星經]~검루상분[黔婁嘗糞]~검루포피[黔婁布被]


검록성경[劍錄星經]  검록은 칼에 대한 해설서이고, 성경은 천문(天文)에 관한 기록서이다.

검루[黔婁]  검루는 육조 시대 남조 양(梁)나라의 효자인 유검루(庾黔婁)를 말한다. 아버지인 유이(庾易)가 병들었을 때 의사가 병세를 알려면 변을 맛보아야 한다고 하니 바로 변을 맛보아서 병세를 가늠하였고, 매일 밤 북두칠성에게 자신이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하늘이 감동하여 유이의 수명을 그달 말일까지 연장해 주었다고 한다. <梁書 卷47 孝行列傳 庾黔婁>

검루[黔婁]  검루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로, 노 양공(魯襄公)과 제 위왕(齊威王)이 정승으로 초빙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죽자 증자(曾子)가 조문을 와서 시호를 무엇으로 지어 줄지를 그의 부인에게 물으니, 그의 부인이 ‘강(康)’으로 지어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은 세상의 담백한 맛을 달게 여기고 천하의 낮은 지위를 편히 받아들였으며, 가난을 슬퍼하지 않고 부귀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고 의(義)를 구하여 의를 얻었으니, 시호를 ‘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列女傳 卷2 賢明傳>

검루[黔婁]  춘추(春秋)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공공(魯恭公)이 그의 어짊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제왕(齊王)도 그를 예로 초빙하여 경(卿)을 삼으려 하였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매우 가난하여 죽은 뒤에 베이불이 작아서 시체를 다 덮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삐뚤게 덮으면 되겠다고 하자, 그의 아내는 “삐뚤게 덮어 남는 것보다는 반듯하게 하여 모자라는 것이 낫다.” 하였다. <高士傳>

검루기두[黔婁祈斗]  남제(南齊) 때 유검루(庾黔婁)의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유검루가 극진하게 병간호를 하면서 부친의 병을 자신이 대신 앓게 해 달라고 매일 밤 북두성(北斗星)에 빌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그대 부친의 수명이 이미 다하여 더 이상 연장해 줄 수 없으나, 그대의 정성스러운 기도가 갸륵하므로 이달 말까지만 연장해 주겠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과연 그믐날에 부친이 별세했다는 고사가 있다. <南史 卷50 庾黔婁列傳>

검루렴피사[黔婁斂被斜]  춘추 시대 제(齊)나라 검루(黔婁)는 청절(淸節)을 지키면서 벼슬하지 않았는데, 노(魯)나라 양공(襄公)과 제나라 위왕(威王)이 모두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검루(黔婁)가 죽었을 때 증자(曾子)가 조문을 갔는데, 염을 할 천이 부족하여 시신의 수족(手足)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고 한다. <列女傳 卷2 魯黔婁妻>

검루상분[黔婁嘗糞]  검루는 양(梁) 나라 때의 효자 유검루(庾黔婁)를 이른다. 유검루는 일찍이 잔릉령(孱陵令)에 부임한 지 10일도 채 안 되었을 때, 마침 그의 아버지 유역(庾易)이 집에서 병환이 생겼는데, 유검루가 갑자기 마음이 놀라면서 온몸에 땀이 흐르므로, 당장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과연 자기 아버지가 병이 난 지 이틀이 되었다. 그런데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병환이 나을지의 여부를 알려면 똥맛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야 한다.”고 하므로, 아버지의 설사한 똥을 가져다 맛보니, 맛이 달았다. 그러자 유검루는 대단히 걱정하면서 매양 북신(北辰)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를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이윽고 공중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들어보니 “징군(徵君: 유역을 가리킴)은 수명이 다하여서 더 연장시킬 수 없다. 그러나 네가 지성으로 기도를 하였으니, 생명이 월말(月末)까지는 이어질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달 그믐에 유역이 죽었다고 한다. <南史 卷五十>

검루상분[黔婁嘗糞]  유검루(庾黔婁)는 중국 양(梁) 나라 때의 효자이다. 아버지 유역(庾易)이 설사병을 앓아 치료를 극진히 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의원의 말에 따라 대변을 맛보았다[嘗糞]. 즉 대변이 달면 쉬 죽고 쓰면 산다는 것이었는데, 대변이 달았으므로 하늘에 기도를 드린 결과 그달 그믐까지 아버지의 수명을 하늘이 연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梁書 卷47>

검루유부[黔婁有婦]  어진 아내가 있다는 뜻이다. 검루는 남제(南齊) 때의 고사인 유검루(庾黔婁)를 가리킨다. 그가 죽자 집이 가난해서 이불로 염(斂)을 했는데, 그나마 얼굴을 가리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얼굴이 나왔다. 이를 본 증서(曾西)가 “이불을 바로 하지 말고 비스듬히 하면 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금루의 아내는 “선생은 생전에 올바르게만 살아왔는데, 이불을 비스듬하게 하여 염하는 것은 선생의 뜻에 어긋납니다.” 하니, 증서가 아무 말도 못했다 한다.

검루지효[黔婁之孝]  유검루(庾黔婁)는 양(梁) 나라 사람으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잔릉 영(孱陵令)으로 있을 때에 자기 아버지가 고향의 집에서 병이 들었는데 검루는 갑자기 놀라 땀이 흘렸다. 그는 이상히 생각하고는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똥을 맛보아 병세의 차도를 알기도 하였으며 밤이면 북극성에 기도드리기도 하였다. 뒤에 아버지가 죽자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梁書 卷47 庾黔婁傳, 南史 卷36 庾黔婁傳>

검루포피[黔婁布被]  검루(黔婁)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은사(隱士)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아서 집이 몹시 가난했으므로, 그가 죽었을 때는 심지어 시신을 가릴 만한 이불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증자(曾子)가 조문을 가서 보니, 베 이불[布被]로 검루의 시신을 덮는데, 머리를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나오곤 하므로, 증자가 이르기를 “그 이불을 귀퉁이 쪽으로 삐딱하게 당겨서 덮으면 가릴 수 있겠다.[斜引其被則斂矣]”라고 하자, 검루의 아내가 말하기를 “이불을 삐딱하게 당겨 덮어서 여유 있는 것이 반듯하게 덮어서 모자람만 못하다.[斜而有餘 不如正而不足也]”라고 했다 한다. <列女傳 卷2>

검루피[黔婁被]  가난한 선비의 대명사이다.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쓴 고사전(高士傳)에 “검루는 제(齊)나라 은사(隱士)였으며, 집이 가난하여 죽을 때에 몸을 감쌀 만한 이불도 없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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