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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단[曲端]~곡대기[曲臺記]~곡도궁[哭途窮]


곡단[曲端]  남송(南宋) 때 사람으로 병략(兵略)에 뛰어나서 일찍이 하인(夏人)과 금병(金兵)을 물리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성질이 강퍅하여 자기 재능만 믿고 상관(上官)을 능멸하곤 하다가, 끝내 위국공(魏國公) 장준(張浚)에 의해, 그가 일찍이 기둥에 써 붙였던 “관중으로 가서 사업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도리어 강가에 와서 고깃배를 띄우도다.[不向關中興事業 却來江上泛漁舟]”라고 한 시가 바로 남도(南渡)한 임금을 가리킨 말이라는 것으로 죄가 얽어져 마침내 공주(恭州)의 감옥에 송치되었다. 그에게 평소 매일 4백 리씩을 달리는 철상(鐵象)이란 말이 있었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 ‘철상이 애석하다.[鐵象可惜]’는 말을 연호(連呼)하고 나서 마침내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다. <宋史 卷三百六十九>

곡단[曲端]  병법(兵法)에 능하여 금 나라 군대를 잘 제어하였는데, 장준(張浚)의 꺼림을 받은 나머지, 그가 예전에 지은 “관중의 사업은 일으키지 못한 채, 강 위의 어부로 세월을 보내도다.[不向關中興事業 却來江上泛漁舟]”라는 시(詩)가 황제를 기롱했다[指斥乘輿]는 죄목에 걸려 옥사(獄死)하였다. <宋史 卷369>

곡단[曲端]  북송 때 사람으로 병법에 능했으며, 금나라와 싸울 때 공을 세워 벼슬이 거듭 올라 선주관찰사(宣州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장준이 천섬 선무처치사(川陝宣撫處置使)가 되었는데 의식을 갖추어 그를 대장군으로 모셨다. 그러나 장준과 화합하지 못하고 남에게 모함당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宋史 卷369 曲端列傳>

곡대[曲貸]  법을 왜곡시켜가며 애써 용서함. 사사로이 은혜를 베품. 곡요(曲饒).

곡대기[曲臺記]  한(漢) 나라 천자가 활쏘기할 때의 의식을 적은 책. 활쏘기하던 궁(宮) 이름이 곡대(曲臺)였던 까닭에 그 이름을 따라 이렇게 이름하였는데, 모두 9편이다.

곡대기[曲臺記]  한나라의 학자였던 후창(后蒼)이 예학에 대해 저술한 후씨곡대기(后氏曲臺記)를 말한다. 곡대(曲臺)는 당시 태상(太常)의 박사 제자들이 거주하면서 저술하고 교서하던 장소였다. 이로 인해 후대에 저술과 교서를 곡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漢書 卷88 儒林傳 后蒼>

곡도궁[哭途窮]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수레를 타고 가다 길이 막히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궁도지곡(窮途之哭)’의 고사가 유명하다. <晉書 阮籍傳>

 곡도창망접취미[曲島蒼茫接翠微]  온정균(溫庭筠)의 시(詩) 이주남도(利州南渡)에 “넘실대는 드넓은 물에 석양이 비치고, 구불구불한 섬 아득히 먼 산 이내와 이어지네.[澹然空水對斜暉 曲島蒼茫接翠微]”라고 한 구절이 있다. ‘곡도(曲島)’는 강 가운데 구불구불한 만을 지닌 작은 섬을 말하고, ‘창망(蒼茫)’은 물안개가 피어오른 아득한 모양으로 여기서는 저녁 빛을 뜻한다. ‘취미(翠微)’는 산허리를 지칭하기도 하고, 산이 푸른 기운을 띤 것 즉 이내를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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