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공융[孔融]~공융예형 탄오치운[孔融禰衡 誕傲致殞]


공융[孔融]  후한(後漢)의 학자이다. 소년 시절에 천하에 명망이 높은 이응(李膺)으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아 명사가 되었다. 공자(孔子)의 20세손이며, 자는 문거(文擧)이다. 헌제(獻帝) 때 북해(北海)의 상(相)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유학(儒學)을 가르쳤으며, 한실(漢室)의 부흥을 꾀하다 실패, 뒤에 조조(曹操)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는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다. <後漢書 孔融傳>

공융[孔融]  공융이 조조에게 맞서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조롱하는가 하면, 조조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도 누차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면서 쓸데없이 거드름을 부리고 업신여기는 말을 많이 한 것이 후한서(後漢書) 권70 공융열전(孔融列傳)에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유감을 품고 원망하던 조조에게 무함을 받고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에 걸려 기시(棄市)되고 멸족을 당했다.

공융[孔融]  후한(後漢) 말엽 노(魯)나라 사람인데, 헌제(獻帝) 때 북해 상(北海相)이 되었기 때문에 공 북해라고도 한다. 북해 상으로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누차 황건적(黃巾賊)에게 패배당하고 그 뒤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자신의 문벌을 믿고 조조(曹操)를 자주 비판하다가 나중에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선비를 좋아하고 문장을 잘하여 왕찬(王粲)·유정(劉禎)·완우(阮瑀)·진림(陳琳)·응탕(應瑒)·서간(徐幹) 등과 같이 건안칠자(建安七子)로 불리었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공융예형 탄오치운[孔融禰衡 誕傲致殞]  공융(孔融)과 녜형(禰衡)은 허풍과 오만으로 명을 재촉함. <顔氏家訓 文章>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에 “공융(孔融)은 조조(曹操)의 야심과 간사한 속임수가 점차 드러나는 것을 보고서 점점 견딜 수가 없어져서, 내뱉는 말이 몹시 비딱하고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문원전(文苑傳)에서는 “예형(禰衡)은 자(字)가 정평(正平)이고 평원(平原) 반(般) 사람이다. 젊어서 말재주가 있었고 기질은 강하고 오만하였으며, 시속(時俗)을 거스르며 만물에 대해 도도함을 즐겨 오직 공융(孔融)하고만 가까웠는데, …… 예형(禰衡)은 평소에 조조(曹操)를 경시하였으므로 조조(曹操)가 용납할 수가 없어서 결국 유표(劉表)에게 보내었다. 뒤에 또 유표(劉表)에게 오만하게 굴자 유표(劉表)는 창피하고 용납할 수가 없어 그를 강하태수(江河太守) 황조(黃祖)에게 보내었다. 황조(黃祖)가 성격이 급했기 때문에 예형(禰衡)을 그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황조(黃祖)가 빈객들을 많이 모아놓고 있었는데 예형(禰衡)의 말이 불손하였다. 황조(黃祖)가 크게 노하여 매질을 하려고 하자 예형(禰衡)이 황조(黃祖)에게 크게 욕을 하니, 마침내 그를 죽이라고 명하였다.”라 하였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