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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탁타전(郭橐駝傳]~곽태이응[郭太李膺]~곽표요[霍嫖姚]


곽탁타[郭橐駝]  유종원(柳宗元)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에 의하면, 곽탁타라는 사람은 나무 심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나무들을 아주 번성하게 잘 길렀는바, 그 방법은 오직 나무의 천성(天性)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얻게 함으로써 나무들이 절로 번성했다고 하는데, 곽탁타는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또한 백성의 천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여 관리들에게 경계의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곽탁타전[郭橐駝傳]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을 말하는데, 그 대략에 의하면, 곽탁타라는 사람은 나무 심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나무들을 아주 번성하게 잘 길렀는바, 그 방법은 오직 나무의 천성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간직하게 함으로써 나무들이 절로 번성했다는 내용이다.

곽태[郭泰]  곽태는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으로,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인데, 군현(郡縣)과 봉국(封國)을 두루 유력하면서 사류를 권장하고 충고하여 좌원(左原)·모용(茅容)·소공자(召公子)·허위강(許偉康) 등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이루게 해 주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곽태[郭泰]  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인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 두건의 한 귀퉁이가 꺾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본받아서 일부러 두건의 한 귀퉁이를 꺾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곽태이응[郭太李膺]  후한 때의 고사 곽태(郭太)는 집안이 매우 빈천했는데,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당대의 고사 이응(李膺)을 한번 만나고 나서는 이응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서로 깊이 사귐으로써 명성이 마침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고, 뒤에 향리(鄕里)로 돌아갈 적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강가에까지 배웅을 나갔는데, 이때 이응, 곽태 두 사람만이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므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그 두 사람을 신선으로 여겼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곽표요[霍嫖姚]  한 무제(漢武帝) 때 일찍이 표요교위(嫖姚校尉)를 지낸 대장군 곽거병(霍去病)을 이르는데, 여섯 차례 흉노(匈奴)에 출전하여 절란(折蘭)·노(盧) 등의 왕을 베어 죽이고, 혼야(渾邪)·둔두(屯頭) 등의 왕에게 항복받는 등 용맹을 크게 떨쳤다. 표요교위로 흉노(匈奴)를 쳐서 공을 세워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漢書 卷五十五 霍去病傳>

곽표요[霍嫖姚]  한 무제(漢武帝) 때에 표요교위(嫖姚校尉)에 임명된 곽거병(霍去病)을 가리킨다. 여섯 번 흉노(匈奴)에 출격하여 11만여 급(級)을 참수(斬首)하고, 그 공으로 7700호(戶)에 봉해졌다. 그가 누차 전공(戰功)을 세웠기에 무제(武帝)가 그를 위해 저택을 지어 주고 가서 보라고 하자, 그가 “흉노가 아직 소멸되지 않았는데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漢書 卷55 霍去病傳>

곽표효[霍驃驍]  곽거병(霍去病)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기련산(祁連山) 일대에서 흉노를 정벌한 명장이다. 표효(驃驍)는 곽거병의 직책인 표기장군(驃騎將軍)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곽거병이 병으로 죽자 무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안(長安)에서 무릉(茂陵)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의 무덤을 축조하였는데, 무덤의 모양을 그가 생전에 전공을 세운 기련산을 본떠 만들었다 한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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