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管寧]

관녕[官寧]  위서(魏書)에 “관녕(管寧)과 화흠(華歆)과 병원(邴原)이 함께 학문을 배웠는데, 세 사람이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그들을 용 한 마리로 불렀는데, 관녕을 용의 머리라고 부르고, 병원을 용의 배라고 부르고, 화흠을 용의 꼬리라고 불렀다.[寧欽邴原俱遊學 三人相善. 故時人號爲一龍 謂寧爲龍頭 原爲龍腹 欽爲龍尾.]”고 하였다. 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신미(辛未 191) 후한(後漢)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에 “관녕(管寧), 병원(邴原), 왕렬(王烈)이 요동(遼東)으로 갔다.[管寧邴原王烈適遼東]”고 하였다.

관녕[管寧]  관녕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유학자로, 자는 유안(幼安)이고 주허(朱虛) 사람이다.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며 40년 가까이 지냈다. 위 명제(魏明帝)가 후한 예를 갖추어 불러도[厚禮徵召후례징소] 전혀 응하지 않았다. 지조를 굳게 지키고 청빈을 달게 여겨, 항상 무명옷에 검은 두건[皁帽조모]를 쓴 채 80세가 넘도록 늘 목탑(木榻)에 꿇어앉아 지냈다고 한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녕[管寧]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 자는 유안(幼安). 북해군 주허현(朱虛縣) 출신으로 관중(管仲)의 9대손이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피해 요동으로 들어간 후 공손도(公孫度)가 제공하는 주거지를 마다하고 직접 초가집을 만들어 기거하였다. 그를 따라 피난 온 이들에게 시경(詩經)과 상서(尙書)를 강의하고 제기의 진열 방법과 예식을 올릴 때 지녀야 할 태도 등을 가르쳤으며, 요동에서 나올 때는 공손도 부자가 준 선물을 간직하고 있다가 떠나올 때 모두 돌려주었다. 조예(曹叡)가 위(魏)나라의 2대 황제에 즉위한 후 태위 화흠(華歆)이 자기 자리를 관녕에게 양도하자 조서를 내렸는데 “(관녕은) 마음속에 도덕을 깊이 간직하고 있고, 가슴에는 육예(六藝)를 숨겨두고 있으며, 맑고도 담백한 점은 고대의 성현에 비길 만하고, 청렴함과 결백함은 지금 시대에 빛나고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관녕은 이를 비롯해 위나라 조정으로부터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결국 어떠한 벼슬에도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 <三國志 魏書 卷11 管寧傳>

관녕[管寧]  중국의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 자는 유안(幼安)이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요동(遼東)으로 피하여 가서 공손도(公孫度)에게 의지하여 지냈는데, 그곳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 한 고을을 이룰 정도였고 이들에게 시서(詩書)를 강론하여 교화(敎化)를 이루었다. 일찍이 나무 걸상[牀榻]에 50년 동안 꿇어앉아서 지내고 다리를 펴지 않았는데, 그 걸상 위에 무릎이 닿은 곳이 모두 뚫어졌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녕[管寧]  삼국 시대 위(魏)나라 주허(朱虛)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항상 같은 나무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50여 년 동안 다리를 뻗고 앉은 적이 없어서 걸상에 무릎이 닿는 곳이 모두 뚫어졌다고 한다. 한말(漢末)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난을 갔는데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관녕의 덕화에 백성들이 감화되어 다투거나 송사하는 일이 없었다. 난이 평정되자 본군으로 돌아갔는데 위 문제(魏文帝)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世說新語 德行> <三國志 魏書 卷11 管寧傳>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