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준[衢樽]~구준[勾皴]~구준[丘濬]~구준[寇準]

구준[衢樽]  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大路)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어진 정사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구준[衢尊]  여러 사람이 자유로이 마시게 항간(巷間)에 설치한 술동이이다. 큰 길거리에 술동이를 놔두고 지나는 사람마다 자기 양(量)대로 마시게 하는 것으로, 곧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큰 길거리 한가운데에 술동이를 두어,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적은 양에 따라 각각 적당하게 떠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名得所宜.]”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교화가 백성들에게 고루 베풀어짐을 가리킨다.

구준[衢樽]  두보(杜甫)의 천추절유감(千秋節有感) 시에 “태평하던 그 시절의 술을 다시 마시지 못하니, 흰 머리의 늙은이에겐 오직 슬픔만 남아 있네.[衢樽不重飮 白首獨餘哀]”라고 하였다. 그 주에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聖人)의 도는 마치 길거리 한 가운데에다 술동이를 놔두는 것과 같도다. 사람마다 가늠하여 마시는 것이 양은 비록 다르지만 저마다 알맞게 마시고 간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其所宜]’라고 한 것을 전거로 삼아 두보가 지난날 태평성대를 회상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구준[勾皴]  산수화를 그리는 기법의 하나로, 구(勾)는 사물의 윤곽을 묘사하는 방법이고, 준(皴)은 산 바위의 종류, 질감, 음영 등을 표현하여 산의 중후함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산수화의 기법을 말한다.

구준[丘濬]  명(明)나라 영종(英宗)・헌종(憲宗)・효종(孝宗) 때 학자이다. 명(明)나라 경주(瓊州) 경산(瓊山) 사람으로 자는 중심(仲深), 호는 심암(深菴)・경산선생(瓊山先生)・경대(瓊臺)・경태(瓊台)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은 예부상서(禮部尙書)와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주자학적(朱子學的)・가례의절(家禮儀節)・오륜전비충효기(五倫全備忠孝記)・나낭기(羅囊記) 등이 있다. <明史 卷181 丘濬列傳>

구준[丘濬]  명(明)나라의 정치가이자 이학가(理學家)이다. 경산(瓊山) 사람으로, 자는 중심(仲深)‚ 호는 심암(深菴)・경산선생(瓊山先生)・경대(瓊臺)이다. 관직은 문연각 대학사(文淵閣大學士)에 이르렀다.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국가의 전고(典故)에 밝았다. 만년에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으나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다. 주희의 학설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가례의절(家禮義節), 오륜전비(五倫全備) 등이 있다. 구준(邱濬)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구준[寇準]  북송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평중(平仲)이고 화주(華州) 하규(下邽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위남渭南) 사람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에 진사가 되어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제수받은 뒤에 귀주(歸州) 파동현(巴東縣)의 지사가 되었고, 나중에 두 차례 재상이 되었다. 건흥(乾興) 원년(1022)에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뇌주(雷州)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시호는 충민(忠愍)이고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졌으며 사후 중서령(中書令)이 추증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구충민(寇忠愍), 구래공(寇萊公) 등으로 불렀다. 시와 문장에 두루 능했으며 구충민시집(寇忠愍詩集)을 남겼다. 백거이(白居易), 장인원(張仁願)과 함께 위남삼(현渭南三賢)으로 병칭되었다.

구준[寇準]  송(宋)나라 태종(太宗)・진종(眞宗)・인종(仁宗) 때의 명신으로 자가 평중(平仲),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춘추삼전(春秋三傳)에 통달하였다. 벼슬은 파동지현(巴東知縣) 등 외직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냈다. 진종(眞宗) 때에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는데, 이때 거란(契丹)이 침입해 오자 중의(衆議)를 배격하고 친정(親征)할 것을 청하여 맹약(盟約)을 성사시키고 돌아와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졌다. 저서에 파동집(巴東集)이 있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昨非菴日纂 3集 宦澤>

구준[寇準]  자(字)가 평중(平仲)으로, 화주(華州) 하규(下邽 산시성陝西省 위남현渭南縣) 사람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경덕(景德) 원년(1004)에 재상에 임명되어 요(遼)나라에 대항할 것을 힘써 주장하여 진종(眞宗)으로 하여금 단주(澶州)로 나가 전쟁을 독려하도록 촉구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파직되었다. 만년에 다시 재상이 되었다가 천희(天禧) 4년(1020)에 지위에서 물러나니,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졌다. 뒤에 곽주(霍州)에 폄적되어 남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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