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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鞫事]~국사[國社]~~국사망애[國事罔涯]~국사무쌍[國士無雙]


국사[鞫事]  국문(鞠問)하는 일. 조선 시대, 국청에서 역적이나 강상죄인 등의 나라의 큰 죄인을 형장을 가하여 신문하던 일을 이른다. 심문(鞫問).

국사[國士]  국사는 일국(一國)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이르는 말로, 한(漢)나라 승상 소하(蕭何)가 일찍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한신(韓信)을 천거한 말 가운데 “여러 장수는 얻기가 쉽지만, 한신 같은 사람은 둘도 없는 국사입니다.[諸將易得耳, 至如信者, 國士無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국사[國士]  온 나라에서 재능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 나라 안에 걸출한 인재를 가리킨다. 좌전(左傳) 성공십육년(成公十六年)에 “진려공(晉厲公)의 좌우에 있던 장사들이 모두 말했다. “나라에 걸출한 인재들이 있고 또 군진이 탄탄하여 막아낼 없습니다.[皆曰國士在, 且厚不可當也]’라고 보인다.

국사[國士]  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가장 우수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자객 예양(豫讓)이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음을 당할 적에 “내가 예전에 섬겼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는 나를 중인(衆人)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중인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지백은 나를 국사로 예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국사로서 보답하려는 것이다.[智伯以國士遇臣 臣故國士報之]”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국사[國社]  제후(諸侯)의 사직(社稷)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제후가 백성을 위해 사(社)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토지신(土地神)을 사(社), 곡신(穀神)을 직(稷)이라 한다. 국토(國土)와 곡식이 없이는 백성이 살 수 없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의 천자(天子)나 기타 제후(諸侯)가 나라를 세우면 사직단(社稷壇)을 세워 국가와 백성을 위해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는데, 천자의 사직을 태사(太社)・태직(太稷)이라 하고 제후의 사직을 국사(國社)・국직(國稷)이라 했다. 우리나라는 신라(新羅) 선덕왕(宣德王) 4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으며, 그 뒤 고려(高麗)는 성종(成宗) 10년에, 조선(朝鮮)은 태조(太祖) 3년에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그 뒤 광무(光武) 1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탄생과 함께 사직도 승격되어 태사・태직이라 칭했다.

국사공[國師公]  유흠(劉歆)의 작호(爵號)이다. <漢書 卷三十六>

국사망애[國事罔涯]  국사가 막막해짐을 이른다.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 안에 견줄 만한 자가 없는 인재. 국사(國士)는 일국(一國)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이다. 무쌍(無雙)은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있을 뿐임을 이른다. 처음에 한신(韓信)이 한왕(漢王 : 한고조漢高祖)을 따라 촉(蜀) 나라에 들어갔다가 써 주지 않으므로 중원(中原)으로 나가려 하였는데, 한나라 승상 소하(蕭何)가 그 말에 놀라 쫓아가 중로에서 데리고 와 한왕에게 천거하기를 “여러 장수는 얻기가 쉽지만, 한신 같은 사람은 둘도 없는 국사입니다.[諸將易得耳, 至如信者, 國士無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국사무쌍[國士無雙]  한(漢)나라 한신(韓信)이 처음 한나라에 귀의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한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소하(蕭何)가 직접 쫓아가서 데리고 돌아오자 한왕(漢王 : 한고조漢高祖)이 소하를 나무랐다. 그러자 소하는 “다른 장수들은 얻기 쉽지만 한신과 같은 자는 국사 중에 짝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諸將易得耳 至如信者 國士無雙]”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한왕(漢王)이 한신을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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