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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대균[屈大均]~굴대부[屈大夫]~굴도기기[屈到嗜芰]


굴대균[屈大均]  본이름은 소륭(紹隆), 자(字)는 옹산(翁山) 또는 개자(介子). 광동(廣東) 번옹(番禺. 廣州市광주시 동남) 사람. 청병(淸兵)이 광주(廣州)에 진격할 무렵 항청군(抗淸軍)에 가담하였다가 패한 후 승(僧)이 되어, 이름을 금종(今種), 자(字)를 일령(一靈)으로 고쳤다. 중년에 환속하여 북방 섬서(陝西), 산서(山西) 각지를 거닐었다. 주이존(朱彛尊)의 천거로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졌고, 학자 고염무(顧炎武)와도 왕래하였다. 그의 시(詩)는 애국의 정을 노래한 것이 많다. 저서로 옹산시략(翁山詩略), 옹산시외(翁山詩外) 및 광동신어(廣東新語)가 있다.

굴대부[屈大夫]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굴원(屈原)을 말한다.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 호는 영균(靈均)이라고 하였다. 원(原)은 초 나라의 귀족으로서 회왕(懷王)을 섬겨 벼슬이 좌도(左徒)에 이르고 큰 신임을 받았다. 회왕이 장의(張儀)의 연횡술책에 빠지는 것을 간하여 장의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부들의 시기를 받아 방축되어 장사(長沙)의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다. 굴원부(屈原賦) 205편으로 유명하다.

굴도[屈到]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대부(大夫) 굴탕(屈蕩)의 아들로 초(楚)나라 경(卿)이다. 이름은 자석(子夕)이다. 국정을 담당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마름을 좋아하여 유언으로 자신의 제사에 마름을 올려달라고 하였다 한다. <國語 卷17 楚語上 屈到嗜芰>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26 菓實部 芰 嗜芰> <五雜組 卷7 人部3>

굴도기기[屈到嗜芰]  굴도(屈到)가 마름을 좋아함. 오잡조(五雜組) 등에 보인다. 굴도(屈到)는 초(楚)나라의 경(卿)이다. 마름을 좋아하여 유언으로 자신의 제사에 마름을 올려달라고 하였다 한다. <國語 卷17 楚語上 屈到嗜芰>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26 菓實部 芰 嗜芰> <五雜組 卷7 人部3>

굴도기기[屈到嗜芰]  굴도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초 나라 막오(莫敖)를 지냈다. 평소 마름을 무척 좋아하여,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제수(祭需)에 마름을 쓰라고 종로(宗老)에게 명하였다. <唐宋八家文 卷21 屈到嗜芰論>

굴도기기[屈到嗜芰]  굴도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大夫)인 탕(蕩)의 아들인데, 평소 마름을 좋아해서 그의 일가 노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제사에 꼭 마름을 쓰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소상(小祥)을 지낼 때에 그의 아들 굴건(屈建)이 “우리 아버지는 사욕(私慾)을 갖고 국법에 저촉되는 일은 일찍이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제사상에 차려 놓은 마름을 치우게 하였다. <國語 卷17 楚語上>

굴도기기[屈到嗜芰]  춘추 시대 초(楚)나라에서 막오(莫敖)를 지낸 굴도(屈到)는 평소 마름을 무척 좋아하여 자신의 제사에 마름을 올리라고 유언을 하였으나 그의 아들 굴건(屈建)이 제사에는 마름을 쓰지 않는다면서 마름 대신 연밥을 썼다고 한다. <唐宋八家文 卷21 屈到嗜芰論> <星湖僿說 卷21 祭物>

굴도지기[屈到之芰]  굴도(屈到)는 초(楚)나라 대신이다. 기(芰)는 마름인데 각이 둘인 것은 릉(菱)이고 셋이나 넷인 것은 기(芰), 곧 세발마름이라 한다. 굴도(屈到)가 평소에 세발마름을 즐겨 먹었는데, 병이 들어 친족들을 불러놓고 “나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세발마름을 올려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國語 楚語>

굴돌개[屈突蓋]  당(唐)나라 장안(長安) 사람으로 벼슬은 장안 영(長安令)을 지냈다. <隋書 卷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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