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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언시산[屈焉是産]~굴완선[屈宛仙]~굴원독성[屈原獨醒]


굴언시산[屈焉是産]  유종원(柳宗元)의 진문(晉問)에 “진(晉)에는 말이 많이 나는데 굴(屈) 지방이 그 산지입니다. 북방이라 찬 기운이 매서워 벼랑이며 계곡이 쩍쩍 갈라진 가운데, 초목은 키가 작고 움츠리며 새와 짐승은 허공을 낮게 날고 굴속에서 몸을 사리고 있지만 말들은 잘 자랍니다.[晉國多馬 屈焉是産 土寒氣勁 崖坼谷裂 草木短縮 鳥獸墜匿 而馬蕃焉]”라고 한 데서 보인다. 굴(屈)은 춘추 때 진(晉)나라 고을 이름으로, 지금의 산서(山西) 길현(吉縣) 북쪽에 있다. 좋은 말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년에 “진(晉)나라 순식(荀息)이 굴(屈)에서 나는 말과 수극(垂棘)에서 나는 옥으로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 괵(虢)을 정벌하자고 했다.”라고 하였다.

굴완선[屈宛仙]  이름은 병균(秉筠), 자는 완선인데 청의 여(女)이다. 원수원(袁隨園)의 여제자로서 소문(昭文) 조자량(趙子梁)에게 출가하여 부부가 다 시에 능하였으며 백묘화훼(白描花卉)를 만들어내어 전고(前古)에 있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이 규합(閨闔) 중 이용면(李龍眠)이라 일렀다. <墨林今話>

굴원[屈原]  굴원(屈原)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다. 또는 스스로 ‘이름은 정칙(正則), 자는 영균(靈均)이다.’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회왕(懷王)을 보좌하여 좌도(左徒),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법도(法度)를 창명(彰明)하고 현능(賢能)을 임용하고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항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양왕(頃襄王) 때에 참소로 인하여 관직을 내놓고 유방(流放)되어 장기간 상강(湘江)과 원강(沅江) 사이에서 유랑하다가 뒤에 초(楚)나라의 영도(郢都)가 진(秦)나라 군대에게 함락되자 멱라강(汨羅江)에 투신자살하였다. 이소경(離騷經) 등의 작품이 전해진다. 자세한 것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보인다.

굴원[屈原]  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楚)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楚懷王) 밑에서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다고 생각한 굴원은 그를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 초혼(招魂) 등이 있다.

굴원[屈原]  굴평(屈平)이다. 원(原)은 자이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일찍이 회왕(懷王)을 보좌하여 삼려대부(三閭大夫)의 높은 직책을 역임했으나, 중상모략을 받아 관직을 떠났다. 양왕(襄王)을 객사하게 한 영윤(令尹) 자란(子蘭)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모함을 받아 양자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는데, 그때 쓴 작품인 어부사(漁父辭)와 맨 처음 양왕을 모시다 모함을 받아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쓴 이소(離騷)가 특히 유명하다.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할 방도가 없음을 통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시는 ‘초사(楚辭)’라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냈으며,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시들은 초기 중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굴원[屈原]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 호는 영균(靈均)이다.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처음에는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으나 제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책(合縱策)을 주장하다가 진나라와 친교해야 한다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한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참언에 의해 면직되었다. 회왕을 이어 왕이 된 아들 항양왕(項襄王) 때 다시 참소를 받고 장사(長沙)로 옮겨지자 멱라수에 빠져 자결하였다. 당시 초나라의 국운을 생각하여 이소(離騷)와 구가(九歌), 천문(天問), 어부사(漁父辭) 등의 글을 남겼다.

굴원독성[屈原獨醒]  굴원(屈原)은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충신으로, 그가 일찍이 소인의 참소에 의해 조정으로부터 쫓겨나 늪가를 행음(行吟)하면서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다 흐리거늘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거늘 나 홀로 깨었는지라, 이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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