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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토심장[窟土深藏]~굴평구사[屈平九死]~굴형[屈形]


굴토심장[窟土深藏]  시골에 은거해 살면서 학문을 닦는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때 사람인 원굉(袁閎)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읽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주군(州郡)에서 여러 차례 징소(徵召)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토실(土室)을 쌓은 다음 그 속에 살면서 창문으로 음식을 들이고 내면서 18년 동안이나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 뒤에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마을에 침입해 왔는데도 원굉이 큰소리로 글을 읽고 있자. 적도(賊徒)들이 원굉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後漢書 卷45 袁閎列傳>

굴평[屈平]  자가 원(原)으로, 전국 시대 초나라의 시인이다. 초사(楚辭)의 창시자로, 작품에 이소(離騷), 천문(天問), 구장(九章) 등이 있다. 그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는데 회왕(懷王)이 그 재능을 중히 여겼으나 근상(靳尙)의 무리에게 참소를 당하여 회왕과 멀어지게 되자 이소(離騷)를 지어서 임금이 깨닫기를 바랐다. 또 양왕(襄王) 때 다시 참소로 강남(江南)으로 귀양을 가니, 어부사(漁父辭) 등 여러 편의 노래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이고는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굴평[屈平]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다. 이름은 평이고 자는 원이다. 회왕(懷王)을 섬겨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 당시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참언으로 왕이 굴원을 내쳤다. 나중에 회왕이 죽은 뒤 경양왕(頃襄王) 때 다시 영윤(令尹) 자란(子蘭)의 참소를 받아 강남(江南)의 원(沅)・상(湘) 일대로 쫓겨났다. 유랑하면서 초나라의 국운을 탄식하며 많은 시를 썼다.

굴평구사[屈平九死]  전국 시대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그래도 내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바이니,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亦余心之所善兮 雖九死其猶未悔]”라는 말이 나온다.

굴평작상류[屈平作湘纍]  굴평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굴원(屈原)이다. 초 회왕(楚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가 모함을 받아 귀양간 후 이소경(離騷經)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투신 자살하였다. <史記 卷八十四 屈原傳>

굴평침상[屈平沈湘]  굴평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이다. 굴평이 처음에는 회왕(懷王)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소인의 참소에 의해 방축(放逐)되자, 이를 비관하여 스스로 상수(湘水)에 빠져죽었다. <史記 卷八十四>

굴포[掘浦]  포구를 파다.

굴형[屈形]  굴원(屈原)의 형체란 뜻으로, 귀양살이 하느라 삐쩍 마른 몸을 말한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이 무고를 당하여 초(楚) 지방으로 유배되어 있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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