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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룡발중서[老龍鉢中棲]~노룡불매[盧龍不賣]~노룡출청[老龍出聽]


노룡발중서[老龍鉢中棲]  진서(晉書) 승섭전(僧涉傳)에 “승섭(僧涉)은 서역(西域) 사람인데 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는 일 없는 승려로 부견(苻堅) 때에 장안(長安)에 들어왔다. 허정하니 기를 마시고 오곡을 먹지 않았는데 하루에 5백리를 가고, 미래의 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영험있게 예언하였다. 능히 비주(祕呪)로써 신룡(神龍)을 내리게 하였다. 매양 날이 가물면 부견이 항상 그로 하여금 용을 주(呪)하여 비를 청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용이 발(鉢) 가운데에 내리자 하늘에서 바로 큰비가 내렸다. 그래서 뭇 신하들이 발에 나아가 구경하였다.[僧涉者, 西域人也, 不知何姓. 少爲沙門, 苻堅時入長安. 虛靜服氣, 不食五穀, 日能行五百裏, 言未然之事, 驗若指掌. 能以秘祝下神龍, 每旱, 堅常使之呪龍. 俄而龍便下鉢中, 天輒大雨. 堅及群臣親就鉢中觀之.]”라고 하였다.

노룡불매[盧龍不賣]  조조(曹魏)가 봉작(封爵)을 주자 전주(田疇)가 사양하면서 “어찌 노룡의 변새(邊塞)를 팔아서 작록과 바꿀 수 있겠는가.”[豈可賣盧龍之塞, 以易賞祿哉?]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十一 魏書 田疇傳>

노룡사이광[盧龍思李廣]  이광(李廣)은 한(漢)나라 사람인데 말을 타고 활을 잘 쏘아 한 문제(漢文帝) 때 흉노(匈奴)를 격파한 공로로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다. 한 무제(漢武帝) 때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가 되자 흉노가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비장(飛將)으로 호칭하였다. 흉노와 전후 70여 차례 싸웠으나 후작(侯爵)을 받지 못하였다. 원수(元狩) 4년에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을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길을 잃고 돌아와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하급 관리에게 국문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자살(自殺)하였다. 노룡은 우북평 관할 변경 지역의 고을 이름이다. <漢書 卷54 李廣傳>

노룡새[盧龍塞]  영평(永平)에 있는 지명으로, 십팔리보(十八里堡)라고도 한다.

노룡새[盧龍塞]  노룡새는 하북성(河北省) 희봉구(喜峰口)이다. 서무산(徐無山) 기슭의 동쪽에 위치하며, 좌측에 매산(梅山)과 우측에 운산(雲山)을 끼고 있다.

노룡음[老龍吟]  큰 소리로 우렁차게 읊조리는 것을 용의 울음소리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노룡중진[盧龍重鎭]  노룡은 하북성(河北省) 북부에 있는 진(鎭)의 이름으로, 당대(唐代)에 이곳에 범양 절도(范陽節度)를 두었던바, 안녹산은 어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일찍이 범양절도 겸 하북채방사(范陽節度兼河北採訪使), 운중 태수(雲中太守),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를 지내면서 점차로 역모를 키워 왔다.

노룡진[盧龍鎭]  노룡진은 방진(方鎭) 이름이다. 노룡(盧龍)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유주(幽州)로 되어 있는데, 당 대종(唐代宗) 광덕(廣德) 원년(763)에 유주 절도사(幽州節度使)가 노룡 절도사(盧龍節度使)를 겸하면서부터 유주(幽州)・유주노룡(幽州盧龍)・노룡(盧龍)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資治通鑑 卷242 唐紀58 穆宗 中 長慶 2年>

노룡출청[老龍出聽]  우승유(牛僧孺)의 유괴록(幽怪錄)에 “무언화상(無言和尙)이 법화경(法華經)을 강하였는데 어떤 노인이 서서 듣다가 마치자 바람을 타고 떠났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묻자 무언 화상은 그가 이수(洱水)의 용이라고 답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로써 설법의 고명함을 표현하였다.

노룡현[盧龍縣]  영평부(永平府)에 속한 현으로, 위(魏)나라 때는 영평부를 노룡(盧龍)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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