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대명계승[大明繼升], 대명계조[大明繼照], 대명궁[大明宮], 대명근지[大命近止]


대명계승[大明繼升]  태양이 지속적으로 떠오른다는 말이니, 곧 제왕(帝王)의 은덕(恩德)이 쇠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대명계조[大明繼照]  임금이 새로 즉위함을 이른다. 소식(蘇軾) 사관직계(謝館職啓)에 “큰 밝음이 뒤이어 비추심에 온갖 법도가 새로워지니, 이재(理財)에 힘쓰고 군사를 훈련함은 오랑캐들을 채찍질할 뜻이 있으시고, 신상필벌(信賞必罰)하심은 조종(祖宗)의 유풍을 따르시려 하십니다.[大明繼照, 百度惟新. 理財訓兵, 有鞭笞戎狄之志, 信賞必罰, 有追述祖宗之風.]”라고 한 데서 보인다.

대명궁[大明宮]  당(唐)의 장안성(長安城)에는 세 개의 궁전(宮殿)이 있었는데 태극궁(太極宮: 서내西內), 대명궁(大明宮: 동내東內), 흥경궁(興慶宮: 남내南內)이 그것이다. 이 삼내(三內)에서 번갈아 조회(朝會)를 하였는데 대명궁(大明宮)이 가장 잦았다.

대명궁[大明宮]  당대(唐代)의 궁 이름이다. 정관(貞觀) 8년 영안궁(永安宮)으로 지었고 9년에 대명궁으로 개명했다. 용삭(龍朔) 2년에 증건하면서 봉래궁(蓬萊宮)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장안(長安) 원년 원래의 대명궁으로 바꿔 불렀다. 동내(東內)라고도 하는데 그 안에 인덕전(麟德殿), 함원전(含元殿), 선정전(宣政殿), 자신전(紫宸殿) 등의 전각이 있었고, 선정전 좌우 양쪽에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있었다. 고종(高宗) 이후에는 황제가 동내(東內)에 상주하였다.

대명궁[大明宮]  당 태종(唐太宗)이 처음 세운 궁전(宮殿) 이름으로, 전하여 대궐(大闕)을 가리킨다. 태극궁(太極宮)의 동북쪽 용수원(龍首原)에 소재한 궁으로, 본래 정관(貞觀) 8년(634) 영안궁(永安宮)이라는 이름으로 당 태종(唐太宗)이 태상황(太上皇)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거처로 지었다. 정관 9년(635) 정월 대명궁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5월 태상황 이연이 붕어하면서 건설이 중단되었다.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662) 대명궁을 중건하고 봉래궁(蓬萊宮)으로 개명하였다. 용삭 3년(663) 고종이 임어(臨御)하여 상주하다가 중종 때 다시 태극궁으로 임어하여 상주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잠시 거처한 적도 있다. 신룡(新龍) 원년(705) 다시 대명궁으로 개명하였다. 개원(開元) 2년(714) 현종(玄宗)이 대명궁에 거처하였으나, 개원 16년(728) 다시 흥경궁으로 임어하였다. 지덕 2년(757) 장안 수복 이후 숙종(肅宗)이 임어하여 상주한 이래로 황제가 상주하는 궁으로 확정되었다. 정문은 단봉문(丹鳳門), 정전은 함원전(含元殿), 함원전의 후전은 선정전(宣政殿)이다. 별전(別殿)·정(亭)·관(觀) 30여개 소가 있었다. 선정전의 좌우에는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홍문관(弘文館)·사관(史館)이 있었다. <舊唐書 地理志 關內道> <新唐書 地理志 關內道 上都>

대명근지[大命近止]  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죽음이 가까운지라, 우러러볼 곳이 없으며 돌아볼 곳이 없노라.[大命近止 靡瞻靡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대명금[大明錦]  명나라 비단을 이른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