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南越] 중국 광주(廣州)를 가리킨다. 이 지역은 본디 남방의 월인(越人)이 거주하였다 하여 광주(廣州)의 별칭으로 쓰인다.
남월[南越] 남월(南粵)로 표기하기도 하며, 지금의 광동(廣東)・광서(廣西) 일대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남월(南越) 지역을 취해 계림(桂林)・남해(南海)・상군(象郡)을 설치하였다.
남월[南越] 남월은 중국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사이에 있던 나라인데 미개한 나라여서 맨상투에 갓을 쓰지 않았다 한다. <史記 卷一百十三 南越列傳>
남월거황옥[南越去黃屋] 황옥(黃屋)은 황색 비단으로 만든 천자의 수레 덮개이다. 육생(陸生)은 전한(前漢)의 육가(陸賈)를 가리킨다. 전한 문제(文帝) 때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가 제호(帝號)를 쓰고 천자의 의장(儀仗)인 황옥과 좌독(左纛)을 사용하고 천자의 행차처럼 출경입필(出警入蹕)하였다. 이에 육가가 사신으로 가서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들은 두 왕이 없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니, 조타가 “황옥과 좌독을 가지고 스스로 즐겨본 것일 뿐입니다.”라 하고 이후로는 제호를 쓰지 않고 천자의 의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남월금[南越金] 한(漢) 나라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사신(使臣)으로 갔다 올 때에 남월왕 조타(趙佗)에게서 황금을 많이 얻어 왔다 한다.
남월도강[攬月倒江] 이태백이 술이 취하여 강을 건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남월영해[南越嶺海]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광서성(廣西省) 일대를 이른다. 이 지역은 오령(五嶺)의 남쪽으로 남해(南海)에 인접해 있으므로 영해(嶺海)라고 부른다. 오령(五嶺)은 강서(江西)・호남(湖南)・광동(廣東)・광서(廣西) 네 성(省)의 접경에 위치한 대유령(大庾嶺)・시안령(始安嶺)・임하령(臨賀嶺)・계양령(桂陽嶺)・게양령(揭陽嶺)의 다섯 고개를 가리킨다.
남월왕[南越王]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조타(趙佗)를 말한다. 조타가 남월(南越)을 차지하고 제호(帝號)를 써서 무제(武帝)라고 칭하고 천자의 의장(儀仗)인 황옥(黃屋)과 좌독(左纛)을 사용하고 천자의 행차대로 출경입필(出警入蹕)하였다. 이에 육가(陸賈)가 사신으로 가서 설득하자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신(臣)이라고 칭했다. 그가 진(秦)나라 남해군위(南海郡尉)로 있었기 때문에 위타(尉佗)라고도 칭한다. <史記 권97 陸賈列傳>
남월폐견[南越吠犬] 중국 남월(南越) 지방은 더운 곳이어서 개가 눈[雪]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고 한다. 유종원(柳宗元)의 ‘위중립이 사도를 논한 편지에 답하다[答韋中立論師道書]’에서 “굴원(屈原)의 부(賦)에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일로 여겨 짖는 것이다.’ 하였네. 내가 전에 ‘용(庸)・촉(蜀)의 남쪽에는 늘 비가 내리고 햇빛 나는 날이 드물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 말을 과장된 말로 여겼었네. 그런데 내가 남쪽 지방으로 온 지 두 해째 되던 6, 7년 전 겨울에 때마침 큰 눈이 오령(五嶺) 너머까지 내려 남월(南越)의 여러 고을을 덮은 일이 있었네. 당시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놀라 어지럽게 짖어대고 물어뜯으며 미친 듯이 날뛰다가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야 잠잠해졌는데,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전에 들은 얘기를 믿게 되었네.[屈子賦曰: ‘邑犬群吠, 吠所怪也.’ 僕往聞庸蜀之南, 恒雨少日, 日出則犬吠, 予以為過言. 前六七年, 僕來南, 二年冬, 幸大雪逾嶺, 被南越中數州, 數州之犬, 皆蒼黃吠噬, 狂走者累日. 至無雪乃已.然後始信前所聞者.]”라고 하였다.
남월황옥[南越黃屋] 신분에 맞지 않게 주제넘은 것을 의미한다. 황옥(黃屋)은 황색 비단으로 만든 천자의 수레 덮개이다.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남월왕 조타(趙佗)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고 황제의 의장(儀仗)인 황옥과 좌독(左纛)을 사용하면서 황제처럼 행세하였는데, 사신으로 간 육가(陸賈)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들은 두 왕이 없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라고 경고하니, 조타가 “황옥과 좌독을 가지고 스스로 즐겨 본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고 이후로는 황제의 호칭이나 의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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