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南游] 이상은(李商隱)의 시 수궁(隋宮)에 “임금이 탄 수레 강남에 노닐어도 경계 엄하지 않으니, 구중궁궐에 누가 있어 상소문을 살필까.[乘興南游不戒嚴 九重誰省諫書函]”라고 한 데서 보인다. 수 양제(隋煬帝)가 재위기간에 세 차례나 강도(江都)로 순유(巡遊)한 것을 말한다.
남유가어[南有嘉魚] 시경(詩經) 소아(小雅) 남유가어(南有嘉魚)에 “남녘 강물에 가어가 있으니, 수많은 통발로 잡아내도다. 군자가 술이 있으니, 훌륭한 손님과 잔치하여 즐기도다.[南有嘉魚 烝然罩罩 君子有酒 嘉賓式燕以樂]”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옛날 군신(君臣)이 연향(燕饗)할 때에 쓰던 악가(樂歌)이다.
남유강회[南遊江淮] 한(漢)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이 남쪽을 여행했던 것을 이른다. 한서(漢書) 권62 사마천전(司馬遷傳)에 “20세에 장강과 회수를 남쪽으로 유람하고, 회계산에 올랐고, 우혈을 탐색하고, 구의산을 살피고, 원수와 상수를 떠다녔다.[二十而南遊江淮 上會稽 探禹穴 窺九疑 浮沅湘]”라는 구절이 있다.
남유교목[南有喬木] 대왕대비(大王大妃)의 교화를 말한다. 시경(詩經) 한광(漢廣)에 “남쪽에 교목(喬木)이 있으니 가서 쉴 수가 없네. 한수(漢水)에 놀러 나온 여자가 있으니 구할 수 없도다.[南有喬木, 不可休息. 漢有游女, 不可求思.]”라고 하였으니, 보통은 문왕의 교화가 남쪽 지방에 미쳤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내조를 잘한 후비(后妃)의 교화가 퍼졌음을 말한 것이다. 당(唐)나라 설직(薛稷)의 의곤묘악장(儀坤廟樂章)에 “교화가 남국에 행해지고, 도가 서릉(西陵)에 성대하네.[化行南國, 道盛西陵.]”라고 하였는데, 의곤묘는 아직 부묘(祔廟)되지 않은 왕비를 위해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이후 화행남국(化行南國)이라는 표현이 후비의 덕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남유사[南遊史] 남유한 사관. 한(漢)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을 이른다. 자는 자장(子長), 태사령(太史令)・중서령(中書令)의 벼슬을 지냈다. 남쪽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여 기를 얻어 문호(文豪)가 되었다고 한다. 저서에 사기(史記) 130권이 있다. 사기(史記)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의하면,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 20세에는 남쪽으로 강수(江水)와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랐다가 우혈(禹穴)을 탐방하고 구의산(九疑山)과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등지를 여행하였고,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옛날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지역에서 강학(講學)을 하며 공자(孔子)의 유풍을 익히고, 양초(梁楚)를 지나 돌아왔다고 한다.
남유여유[男唯女兪]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아이가 밥 먹을 줄을 알거든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가르치고, 말할 줄을 알거든 사내아이는 빨리 대답하고, 여자아이는 유순하게 대답하도록 가르친다.[子能食食, 敎以右手. 能言, 男唯女兪.]”라고 하였다.
남윤미[藍尹亹] 초(楚)나라의 대부(大夫)로, 이름이 미(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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