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郎中] 연산군 때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신에게 제사할 때 반드시 남자 무당을 썼는데, 그를 낭중이라고 불렀다.
낭중[郎中] 숙위(宿衛). 낭중령(郞中令)에 딸린 관리로, 낭관(郞官)의 별칭이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낭중[郎中] 전국(戰國)시대 처음 출현했고, 진한(秦漢)시대에는 궁궐의 문호(門戶)와 거기(車騎) 등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안으로는 시위(侍衛)에 충당되고 밖으로는 전쟁에 종군(從軍)하여 황제의 시종관의 통칭이 되었다. 후대 내조(內朝)가 강화되면서 요직으로 부상하였다.
낭중[郎中] 진한(秦漢)시대 때 황제의 시위(侍衛)를 담당했던 관직명이다. 진나라 때 시위의 직분을 셋으로 나누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外朗)이라 했다.
낭중다소로신구[囊中多少勞神句] ‘고심하여 잘 지은 시[勞神句]가 주머니 속에 얼마나 들어 있나?’라는 말로, 당나라 이하(李賀)가 매일 집 밖에 나가면서 아이종에게 비단 주머니를 지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지을 적마다 그 주머니에 넣었다는 고사를 원용한 표현이다. <新唐書 卷203 李賀列傳>
낭중령[郎中令] 벼슬이름이다. 진(秦)나라 때 처음 설치하여 한(漢)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9경 중의 하나로 조정에서 황제의 좌우에서 가까이 받드는 고급 관직으로 시종(侍從)・경위(警衛)・고문(顧問) 등의 우두머리이며, 대부(大夫)・낭관(郎官)・알자(謁者)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중에 광록훈(光祿勛)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낭중령[郎中令] 낭중령(郎中令)은 후대 광록훈(光祿勳)으로 개칭된다. 궁중과 황실 내의 여러 관(官)을 감독 하고 통솔하는 직책이다. 그 아래에는 태중대부(太中大夫), 중대부(中大夫), 간대부(諫大夫) 등 3인의 대부가 있다. 이들은 모두 황제에 대한 자문의 역할을 하였다. 중대부는 뒤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명칭이 바뀌었고 궁중에 머물면서 황제의 자문역할을 하였다. 낭중령(광록훈) 아래에는 낭관(郎官)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로서 모두 관리 지망생이었다. 랑(郎)들은 궁실의 여러 전문(殿門)을 숙위(宿衛)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황제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 발탁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이들은 낭중령의 심사와 추천을 받아 관료로 진출하였다.
낭중모추[囊中毛錐] 모추는 모수(毛遂)의 송곳이다. 모수는 전국(戰國) 시대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식객(食客)이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9년에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하자 평원군이 초(楚)나라로 가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수행원 20명을 선발하였다. 모수가 자신도 가겠다고 자원하니, 평원군이 말하기를 “유능한 선비가 세상에 있으면, 이는 마치 자루 속에 송곳이 들어가면 송곳 끝이 곧바로 드러나는 것처럼 알려집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은 제 문하(門下)에 3년간 있었으나 제가 선생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으니, 이는 선생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모수가 말하기를 “제가 오늘 자루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저를 자루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면 송곳 자루까지 삐져나올 수 있도록 하지 송곳 끝만 드러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평원군이 그를 선발하였다. 초나라에 이르러 평원군과 초왕(楚王)이 합종(合從)을 놓고 하루 종일 결론을 내지 못하자 모수가 칼을 들고 올라가 초왕을 협박하면서 이해(利害)를 열거하며 설득하여 합종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초왕과 평원군이 돌아와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낭중물[囊中物] 자루 속에 있는 물건. 극히 손에 넣기 쉬운 물건. 주머니 안에 든 물건(物件)이라는 뜻으로, 자기(自己) 손에 들어 있는 물건(物件)을 이르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