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두매[隴頭梅] 고갯마루의 매화를 말한다. 당시별재집(唐詩別裁集)에 “농두(隴頭)는 령두(嶺頭)일 것이다.[隴頭疑是嶺頭]”라고 하였다.또 백씨육첩(白氏六帖) 매부(梅部)에 “대유령(大庾嶺) 위의 매화(梅花)는 남쪽 가지에 꽃이 지면 북쪽 가지에 꽃이 핀다.”고 하였다. 대유령(大庾嶺)은 아열대 지역이기 때문에 10월에 매화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고개 위에 매화가 많아 매령(梅嶺)이라고도 하였다. 형주기(荊州記)에 “육개(陸凱)와 범엽(范曄)이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육개가 강남(江南)에서 매화 한 가지를 부쳐 장안(長安)에 있는 범엽에게 보내고 아울러 준 시에 ‘꽃가지 꺾다가 역사(驛使)를 만나서 농두(隴頭)의 사람에게 부치네. 강남에는 가진 것이 없어, 애오라지 한 가지의 봄을 보낸다네.’라고 하였다.[陸凱與范曄相善 自江南寄梅花一枝 詣長安與曄 幷贈詩曰 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는 기록이 있다.
농두매[隴頭梅] 남방은 기후가 따뜻하여 시월에 매화를 볼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길 양쪽에 홍백의 매화가 피어 매령지추(梅嶺之秋)라고도 했다. 농두(隴頭)는 영두(嶺頭), 즉 고갯마루를 가리킨다.
농두수[隴頭水]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한양군(漢陽郡) 농현(隴縣)은 주자사(州刺史)의 관할로 농지(隴坻)라는 이름의 큰 비탈이 있다.”라 하였고, 주(注)에 삼진기(三秦記)를 인용하여 “그 비탈은 아홉 번을 돌아가는데 그 높이가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오르는 사람은 7일을 올라야 넘을 수가 있다. 정상은 100여 가구를 수용할 정도의 넓이인데, 맑은 물이 솟아 사방으로 흘러내린다.”라 하였다. 또 곽중산(郭仲産)의 진주기(秦州記)를 인용하여 “농산(隴山)은 동서로 180리가 되는데, 고개에 올라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진천(秦川)이 4, 5백 리 너머에 가물가물하다. 산 동쪽 사람이 행역 나와서 이곳에 올라 돌아보면 고향생각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래서 ‘농두(隴頭)에 물이 흘러 사방으로 나뉘어 내려가네. 생각하니 나 행역 나와 넓은 들판을 떠도누나. 높은 데 올라 멀리 바라보니, 눈물 흘러 두 줄기로 떨어지네.’라고 노래했다.”라 하였다.
농두수[隴頭水]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의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물인데, 이 지역은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므로 흔히 변경 지방에 있는 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농두수곡[隴頭水曲] 악부 횡취곡사(横吹曲辭)의 하나인 농수음(隴水吟)을 말한다. 농두음(隴頭吟)이라고도 한다.
농두음[隴頭吟] 악부 횡취곡사(橫吹曲辭) 중의 하나로, 농두수(隴頭水), 출관(出關)이라고도 한다. 농두수는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인 섬서성(陝西省)의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물의 이름이다. 성현은 당나라 왕유(王維)의 작품을 의작한 것으로 보이며, 국경 지역에 근무하며 오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장사(將士)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농두인[隴頭人] 후위(後魏)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의 매화가지 하나를 친구인 범엽(范曄)에게 보내면서 “매화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자 만나, 농산(隴山) 끝의 벗에게 부쳐 주노라. 강남이라 내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겨우 한 가지[枝]의 봄을 드릴 뿐이네.[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라고 읊은 시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970 所引 荊州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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