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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허대[凌虛臺]~능허대기[凌虛臺記]~능호기정[能好其正]


능허대[凌虛臺]  송(宋)나라 진희량(陳希亮)이 봉상(鳳翔)의 태수로 있을 때 관사 후원에 지은 누대로, 이곳에서 남산(南山)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기러기를 쏘며 풍악을 즐겼는데, 그때의 광경을 묘사한 소식(蘇軾)의 능허대기(凌虛臺記)가 전한다. <蘇東坡詩集 卷5>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능허대기(凌虛臺記) 뒤에 “진희량(陳希亮)은 자가 공필(公弼)인데 강정(剛正)한 사람이었다. 가우(嘉祐) 연간에 봉상부(鳳翔府)를 맡았는데 동파(東坡)가 처음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었다. 이에 아전들이 동파를 소현량(蘇賢良)이라고 부르자, 진공(陳公)은 노하여 말하기를 ‘부(府)의 판관(判官)이 무슨 현량(賢良)인가?’라 하고는 그 아전을 곤장을 치고 돌아보지 않았다. 동파가 재초기도문(齋醮祈禱文)을 짓자, 공필은 반드시 먹을 칠하여 고쳐서 여러 차례 오갔었는데, 동파가 공필을 위하여 능허대기(凌虛臺記)를 짓자 공필이 이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 소명윤(蘇明允: 蘇洵소순) 보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소식(蘇軾)을 손자처럼 여긴다. 그런데 내 평일에 말과 얼굴빛을 너그럽게 하지 않은 까닭은 소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큰 이름을 얻으니, 너무 가득 차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내 이제 즐겁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빨리 비석에 새기라고 명하였다.[陳希亮 字公弼 剛正人也 嘉祐中 知鳳翔府 東坡初擢制科 簽書判官事 吏呼蘇賢良 公怒曰 府判官 何賢良也 杖其吏不顧 坡作齋醮祈禱文 公弼必塗墨改正 數往返 至爲公弼作凌虛臺記 公弼覽之 笑曰 吾視蘇明允猶子也 軾猶孫也 平日不以辭色假之者 以其年少 暴得大名 懼夫滿而不勝也 乃不吾樂也 不易一字 亟命刻之石]”라고 보인다.

능허대기[凌虛臺記]  소식(蘇軾)이 지었다. 이 글에 대하여 왕문고(王文誥)의 소문충공시편주집성총안(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4권에 “가우(嘉祐) 8년 4월에 태수(太守) 진희량(陳希亮)이 채원(菜園) 뒤에 능허대(凌虛臺)를 세우고 남산(南山)을 조망하였는데, 동파공(東坡公)에게 기문(記文)을 쓰게 하니, 공이 이를 인하여 풍자하였다.”라고 보인다. 능허(凌虛)는 하늘을 오른다는 뜻이다. 가우(嘉祐) 8년 정월에 동파(東坡)를 몹시 아끼던 태수(太守) 송선(宋選)이 물러나고 진희량(陳希亮)이 부임하였는데, 진희량의 성격이 강정(剛正)하여 자유분방한 동파(東坡)와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파가 능허대기(凌虛臺記)를 쓰면서 은근히 태수를 풍자한 것인데, 나중에 진희량의 진심을 알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낭엽(郎曄)의 경진동파문집사략(經進東坡文集事略) 48권의 주(注)에 의하면 동파가 능허대기를 지어 올리자, 진희량은 “내가 소명윤(蘇明允: 蘇洵소순) 보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소식(蘇軾)을 손자처럼 여긴다. 그런데 내 평일에 말소리와 얼굴빛을 너그럽게 하지 않은 까닭은 소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큰 이름을 얻으니, 너무 가득 차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내 이제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빨리 비석(碑石)에 새기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능호기정[能好其正]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오직 군자만이 정대함을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소인은 정대함을 오히려 해롭게 여긴다.[唯君子能好其正 小人毒其正]”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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