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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례[達禮]~달로[㺚虜]~달마[㺚馬]~달마척리[達磨隻履]


달례[達禮]  공통된 예라는 의미인바,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북방에 장례를 하되 머리를 북쪽으로 두게 하는 것은 삼대의 공통된 예이다.[葬於北方北首, 三代之達禮也.]”라고 보인다.

달로[㺚虜]  조선과 중국의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그 계통은 분명하지 않으나 시대에 따라 달단(韃靼)・몽고(蒙古)・거란(契丹) 등으로 불리던 종족의 일부이며, 이때의 달로는 원(元)이 망한 뒤에 북으로 달아나 흩어져 살던 이들을 말하는데, 명(明)의 북부와 조선의 평안도 북변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

달로화적[達魯花赤]  몽고어 다루가치(darughachi)의 음역(音譯)으로, 원(元)나라 때 관직의 명칭인데, 진압자(鎮壓者), 제재자(制裁者), 개인자(蓋印者)를 지칭하였고, 다시 감림관(監臨官), 총할관(總轄官)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점령 지역 내의 민정(民政)을 감시하기 위해서 설치하여 그 지역 백성을 직접 다스리거나 내정에 관여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한인(漢人)이 정직(正職)을 맡지 못하였고, 조정의 각부(各部) 및 각로(各路)와 부주현(府州縣)에 모두 달로화적을 설치하여, 몽고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이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사(元史) 6권 세조본기(世祖本紀)에 “몽고인을 각로의 달로화적으로 삼고, 한인을 총관(總管)으로, 회회인(回回人)을 부관(副官)으로 삼되 이를 영원한 정제(定制)로 삼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달마[㺚馬]  두만강 건너 사는 야인(野人) 즉 오랑캐가 기른 말이다.

달마[達摩]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중으로 천축인(天竺人)인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 영접하여 금릉(金陵)에 와서 불리(佛理)를 담론하고 강을 건너 위(魏)로 가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앉아 면벽(面壁)한 지 9년 만에 화거(化去)하였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시호는 원각대사(圓覺大師).

달마[達磨]  선종(禪宗)의 시조. 남인도(南印度)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서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하고, 양 무제(梁武帝) 때 중국에 건너와 무제와 문답했으나 기연이 맞지 않으므로,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고 나서 크게 오도(悟道)하여 선종(禪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산스크리트 다르마dharma의 음역으로 법(法)을 가리키기도 한다.

달마씨[達磨氏]  서천(西天)의 제28조(祖)로서 중국에 건너와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보리달마(菩提達磨)를 가리킨다.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서 면벽(面壁) 좌선(坐禪)을 하였으므로,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달마척리[達磨隻履]  달마대사가 죽어 웅이산(熊耳山)에 장사 지낸 지 3년이 지났을 때, 위사(魏使)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사신갔다 돌아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를 만났는데, 달마가 이때 신 한 짝만 손에 들고 홀로 가면서 “내가 서역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송운이 와서 그 사실을 임금에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 달마의 탑(塔)을 열고 관(棺)을 꺼내 보니, 거기에도 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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