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과[東門瓜] 진(秦)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진 소평(邵平)이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평민의 신분이 되어 장안성(長安城) 동문 밖에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했는데, 특히 그 오이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동릉과(東陵瓜)라고 일컬어졌다. 사기(史記) 권5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서 “소평이란 사람은 진나라 때 동릉후를 말한다. 진나라가 망한 뒤 베옷을 입고 가난하게 지내며 장안성 동쪽에 오이를 심었다. 사람들이 맛이 좋은 그 오이를 동릉과라 하였는데 소평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邵平者, 故秦東陵侯. 秦破爲布衣貧, 種瓜於長安城東, 瓜美, 故世俗謂之東陵瓜, 從邵平以爲名也.]”라고 하였다.
동문과[東門瓜] 진(秦) 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진 소평(邵平)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포의(布衣)가 되어 장안성(長安城) 동쪽 청문(靑門) 밖에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했는데, 특히 그 오이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동릉과(東陵瓜)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 청문은 곧 동문의 별칭이다.
동문관[同文館] 송(宋) 나라 때 사방관(四方館) 가운데 하나로, 청당(靑唐)과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동문괘관[東門掛冠] 동 문(東門)에 관(冠)을 걸다.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서 벼슬을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봉맹(逢萌)은 자(字)가 자강(子康)이며 북해(北海) 사람으로, 춘추(春秋)에 밝았다. 왕망(王莽)이 충간(忠諫)하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그는 “지금은 삼강(三綱)이 끊어졌으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화환(禍患)이 닥칠 것이다.”라 하고, 관을 벗어 동문에 걸어 두고는 떠나 요동(遼東)에 가서 살았다 한다. 전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逢萌>
동문괘안[東門掛眼] 춘추시대 오(吳)와 월(越)이 다툴 때에, 월(越)나라가 오(吳)나라에 패하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미인 서시(西施)를 바치면서 강화를 간청하였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왕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라는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태재(太宰) 비(嚭)의 참소를 듣고 오자서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죽기 전에 오자서가 측근에게 유언하기를 “반드시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서 오왕의 관을 짜도록 하라. 그리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도성의 동문 위에 걸어 두어라.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오나라를 멸하는 것을 똑똑히 보려 한다.[必樹吾墓上以梓, 令可以為器. 而抉吾眼縣吳東門之上, 以觀越寇之入滅吳也.]”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베어 북었다. 오왕 부차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끌어내다가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과연 9년 뒤에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와 백비를 죽였다. 이 내용은 사기(史記) 권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등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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