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때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시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히 끓여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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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步詩칠보시 / 曹植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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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식[曺植] 성은 조(曺), 이름은 식(植), 자(字)는 자건(子建), 시호는 사(思)이다. 위(魏)나라 태조(太祖) 조조(曺操)의 셋째 아들. 아버지가 식(植)을 총애하여 태자로 세울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형 조비(曺丕)와 대립하였다. 비(丕)가 문제(文帝)로 등극하자 식(植)은 봉지(封地)를 전전하며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문제(文帝)가 죽은 후 조카인 명제(明帝: 조예曺叡)에게 표(表)를 올려, 자기를 중용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에 진왕(陳王)으로 봉(封)해져, 봉지인 진(陳)에서 죽었다. 죽은 후 시호(諡號)에 따라 진사왕(陳思王)이라 불린다. 약 80여 수의 시가 전하며, 사부나 산문도 40여 편 남아 있다. 칠보시(七步詩)가 유명하다.
- 조식[曹植]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아들이며,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아우이다. 자는 자건(子建), 진왕(陳王)에 봉해지고 시호가 사(思)이기 때문에 후대에 문장에서 자주 진사왕(陳思王) 또는 진왕(陳王)으로 불려졌다. 패국(沛國: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박주시亳州市) 사람으로 조조(曹操)의 넷째 아들이며 적출로는 셋째 아들로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이름 높은 시인이다. 그의 시가(詩歌)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학적 재능 또한 후세 시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부친 조조와 맏형 조비(曹丕)와 함께 삼조(三曹)로 병칭되며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학사상의 주공(周公)·공자(孔子)라 칭송되었다. 조조가 조식의 재능을 높이 샀던 것과 달리, 조비가 제위에 오른 뒤로는 줄곧 정치적 핍박을 받은 끝에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마흔한 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전하는 그의 작품 100여 편은 대부분 5언시인데, 후대 사람에 의해 엮인 진사왕집(陳思王集) 속 그의 작품들은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성취와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조식의 재능에 대해 남조 송나라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은 “천하의 글재주가 모두 합쳐서 한 섬이라면, 조자건 혼자 여덟 말을 차지하고, 나는 한 말이요, 나머지 한 말을 천하 사람들이 나누어 갖고 있다.[天下才共一石, 曹子建獨佔八斗, 我得一斗, 天下共分一斗]”라고 하여 재고팔두(才高八斗), 팔두지재(八斗之才), 칠보지재(七步之才) 등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품(詩品)을 지은 종영(鍾嶸)은 조식에 대해 “골기가 기이하고 높으며, 시어가 다채롭고 아름답고 풍부하다. 감정은 고아함과 원망을 겸비하고, 문체의 겉과 속이 함께 충실하여, 그 빛이 고금을 넘쳐나는데 뛰어남에 있어서 그와 견줄 자가 없다.[骨氣奇高, 詞彩華茂, 情兼雅怨, 體被文質, 粲溢古今, 卓爾不群.]”라고 하면서 그를 왕찬(王粲), 유정(劉楨)과 병칭하여 조왕(曹王), 조유(曹劉)라고 하였으며, 청대(淸代)의 시인 왕사정(王士禎)은 “한위(漢魏) 이래 2천 년의 시(詩)를 논함에 있어서 선재(仙才)라 할 만한 이로는 조식(曹植)과 이백(李白), 소식(蘇軾) 세 사람이 있을 뿐이다.[漢魏以來二千年間, 詩家堪稱仙才者, 曹植·李白·蘇軾三人耳.]”라고 하였다.
-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은 시(詩).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식(曹植)이 형인 문제(文帝:曹丕조비)의 미움을 받아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詩)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위협(威脅)을 받은 즉시(卽時) 일곱 걸음만에 지어서 죽음을 모면하였다는 시(詩)이다. <世說新語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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