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리[劍履] 검리는 칼과 신발.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 허리에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임금을 뵐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대신이란 뜻이다. 검리상전(劍履上殿). <史記 卷五十三 蕭相國世家>
검리[劍履] 조복(朝服) 등 유물을 말한다. 옛날 중신이 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서 검을 풀거나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임금 앞에 나아갔던 ‘검리상전(劍履上殿)’의 고사가 있다.
검리상성신[劍履上星辰] 검리(劍履)는 허리에 칼을 그대로 차고 신발을 벗지 않고서 조회한다는 말로 임금의 특별한 은총을 뜻하고, 성신은 대궐 조정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이에 소하의 공을 첫째로 삼아 검리를 그대로 띠고 전폐(殿陛)에 오르게 하였다.[于是乃令蕭何第一 賜帶劍履上殿]”라고 하였다.
검리용전[劍履龍殿] 허리에 칼을 그대로 차고 신발을 벗지 않고서 조회한다는 말로, 임금의 특별한 은총을 뜻한다. 용전(龍殿)은 임금이 계신 궁전이고 검리(劍履)는 칼과 신발이다. 본디 조관(朝官)이 대궐(大闕)의 전상(殿上)에 올라갈 때는 칼을 차지 못하고 신도 신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중신(重臣)에게는 특별히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윤허하여 특별한 광영(光榮)을 보인 것으로, 한 고조(漢高祖)가 일찍이 상국(相國) 소하(蕭何)에게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전상에 오르고, 조정에 들어와서 총총걸음도 걷지 말도록 특별히 예우(禮遇)했다. 사기(史記) 권5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소하(蕭何)의 공을 첫째로 삼아 검리를 그대로 띠고 전폐(殿陛)에 오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검막[儉幕] 왕검(王儉)의 막(幕)으로, 막부(幕府)의 별칭이다. 연부(蓮府), 연막(蓮幕)이라고도 한다. 남조(南朝) 제(齊)의 위군장군(衛軍將軍) 왕검이 재사(才士)를 많이 영입하여 막부를 열자, 당시 사람들이 연화지(蓮花池) 혹은 연화부(蓮花府)라고 일컬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南史 卷49 庾杲之列傳>
검막[儉幕] 왕검(王儉)의 막(幕)이란 말. 남사(南史) 유과지전(庾果之傳)에 “과지(果之)의 자는 경행(景行)인데 왕검(王儉)이 이부(吏部)가 오자 불러서 막빈(幕賓)을 삼으니 소면(蕭沔)이 왕검에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성부(盛府)의 수료(首僚)는 실로 선임하기 어려운 바인데 경행(景行)이 녹수(綠水)에 떠 부용(芙蓉)에 의지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고운가.’ 하였다. 그래서 연막(蓮幕)이라고 한다.” 하였다.
검매우[劍買牛] 한서(漢書) 공수전(龔遂傳)에 “공수가 제(齊) 지방의 풍속이 사치하고 칼 쓰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백성에게 농상(農桑)을 권하기 위하여 칼을 팔아 소를 사게 했다.”라 하였다.
검문[劍文] 반강검문(蟠鋼劍文)의 준말로, 명검(名劍)의 이름이다. 송(宋)나라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기용(器用)에 “옛날 명검에 침려와 어장의 이름이 있다.[古劍有沈廬魚腸之名]”라고 하고, 또 “어장은 바로 지금의 반강검으로, 송문이라고도 하는데……바로 오늘날의 반강검문과 같다.[魚腸卽今蟠鋼劍也 又謂之松文……正如今之蟠鋼劍文也]”라는 말이 나온다.
검문[劍門]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북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대검산(大劍山)이라고도 하는데, 촉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1인으로 만인을 감당할 수 있는 방어의 요충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대단히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검각산(劍閣山).
검문객[黔吻客] 공부할 때 늘 벌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서(隋書) 예의지(禮儀志)에 “글자를 빠뜨리거나 오자(誤字)를 쓴 사람은 불러내어 좌석 뒷자리에 서 있게 하고, 글씨가 용렬한 자에게는 벌로 먹물 한 되를 마시게 했다.”라고 하였다.
검문비학[劍門飛鶴] 검문은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험한 절벽으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인데 검문이 하도 높아 나는 학도 지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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