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비파유원다[公主琵琶幽怨多] 이기(李頎)의 시(詩) ‘고종군행(古從軍行)’에 “어두운 모래바람 병사들의 조두소리, 공주를 위해 타던 비파처럼 몹시도 서글퍼라.[行人刁斗風沙暗 公主琵琶幽怨多]”라는 구절이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오손국(烏孫國)과 화친(和親)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국왕(烏孫國王)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때 비파를 연주하여 세군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석숭(石崇)의 왕소군사서(王昭君辭序)에 “옛날 공주가 오손(烏孫)으로 시집갔는데, 말 위에서 비파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여 그녀가 가는 길에 고향 생각을 위로하도록 하였다.[昔公主嫁烏孫 令琵琶馬上作樂 以慰其道路之思]”고 하였다.
공주오손만리정[公主烏孫萬里程] 한(漢) 나라 공주(公主)가 오손왕(烏孫王) 곤막(昆莫)에게 시집가면서 슬픈 회포를 비파의 곡조로 탔다.
공주위증[公主爲證]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뒤에 여 태후(呂太后)의 족속(族屬)들이 대단히 득세하여 왕실인 유씨(劉氏)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한 고조의 공신(功臣)인 주발은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여씨(呂氏)들을 모조리 섬멸하여 왕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뒤에 모반(謀反)하려 한다는 무고를 입고 정위(廷尉)에게 넘겨져 그 사실을 조사받을 때, 미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옥리(獄吏)에게 천금(千金)을 주자, 옥리가 옥사(獄事) 문서의 뒷면에다 ‘며느리인 공주로 증거를 대라.[以公主爲證]’는 문구(文句)를 써서 주발에게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그 원옥(冤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강후(絳侯)는 한 고조의 공신(功臣)인 주발(周勃)의 봉호이다.
공주위증[公主爲證] 한 문제(漢文帝) 때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승상(丞相)에서 물러나 강현(絳縣)에 취임해 있다가 ‘주발이 모반(謀反)하려 한다’는 어떤 자의 고변(告變)으로 인하여 무고하게 장안(長安)으로 체포되어 가서 조사를 받던 중, 어떻게 소명(疏明)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옥리(獄吏)에게 천금(千金)을 주고 방도를 강구한 결과, 옥리가 문서의 뒷면에다 “공주로 증거를 대라.[以公主爲證]”는 말을 써서 보여 주므로, 그의 말대로 공주를 증거로 삼아서 가까스로 용서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인데, 공주는 바로 문제(文帝)의 딸로서 주발의 자부(子婦)가 되었으므로, 그를 증거로 삼게 했던 것이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공주한[孔周翰] 공주한은 송나라 때 인물이다. 그는 사마광(司馬光)의 격물설을 부연하여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요하여, 그 본성은 본디 불선함이 없다. 그러나 불선한 짓을 하는 것은 외물이 꼬드겨서이다. 이른바 격물하여 앎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또한 외물의 꼬드김을 막아 제거하면 본연의 선은 절로 밝아질 뿐이라는 것이다.[人生而靜 其性本無不善 而有爲不善者 外物誘之也 所謂格物以致其知者 亦曰扞去外物之誘 而本然之善自明耳]”라고 하였다. <大學或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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