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관군[霍冠軍]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名將) 곽거병(霍去病)의 봉호이다. 흉노(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여러 번 세웠다. <史記 卷一百十一 衛將軍驃騎列傳>
곽광[霍光]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의하면 “이때 무제(武帝)가 연로하고 총희(寵姬) 구익부인(鉤弋夫人) 조첩여(趙倢伃)에게 남아(男兒)가 있었으므로 무제(武帝)는 그를 후사(後嗣)로 삼고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보좌하게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여러 신하들을 살펴보니, 오직 곽광(霍光)만이 중책을 맡겨 사직(社稷)을 부탁할 만하였다. 그래서 무제(武帝)는 황문화가(黃門畵家)로 하여금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諸侯)에게 조회 받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곽광(霍光)에게 주었다. 뒤에 무제(武帝)가 병이 위독하자, 곽광(霍光)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만일 승천하시면 누가 사위(嗣位 왕위를 이어받음)에 합당할까요?’라고 물으니, 무제(武帝)는 ‘그대는 전에 그려준 그림의 뜻을 모르는가? 어린 아들을 세우고 그대가 주공(周公)의 일을 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제(武帝)는 곽광(霍光)을 봉하여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고, 무제(武帝)가 서거한 뒤에 효소제(孝昭帝)가 사위(嗣位)하여 나이 8세였는데, 정사가 일체 곽광에게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곽광[霍光] 곽거병(霍去病)의 이복동생으로, 한나라 무제(武帝) 때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어 20년 동안 궁궐에 출입하면서 근신하여 허물이 없었다. 소제(昭帝)가 8세로 즉위하자 유조(遺詔)를 받들어 그를 잘 보필하여 박릉후(博陵侯)가 되었다.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을 세웠으나 음란하다고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곽광은 20여 년간 정권을 잡고서 친척들을 많이 기용하였는데, 그가 죽고 선제가 친정을 하면서 모반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의 족속을 멸하였다. <漢書 卷68 霍光傳>
곽광[霍光] 곽광은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소제(昭帝)의 뒤를 이어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창읍왕이 향연과 음란을 일삼자 즉위 27일 만에 폐위하고 무제의 증손인 유순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에 시어사(侍御史) 엄연년(嚴延年)은 선제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시켰으니 신하의 예가 없다는 내용으로 곽광을 탄핵하였다. 선제는 이 상주문을 정지시켰으나, 이후 조정에서는 엄연년을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24 漢紀16 昭帝 下>
곽광[霍光] 곽광은 한(漢)나라 때 평양(平陽) 사람으로 곽거병(霍去病)의 배다른 아우이다. 그는 무제(武帝), 소제(昭帝), 선제(宣帝)의 세 조정을 섬겨 천하의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식읍(食邑)이 이만호(二萬戶)에 이르렀으며, 특히 선제를 영립하여서는 부역과 조세를 견감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의 친인척들이 대거 조정에 포진되어 득세하였고, 선제가 즉위한 뒤에도 모든 일을 자신이 결제한 뒤에 보고하였다. <漢書 卷68 霍光傳>
곽광[霍光] 자는 자맹(子孟)이다. 한 소제(漢昭帝) 때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20년 가까이 정권을 잡고서 한(漢)나라 왕실의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기린각(麒麟閣) 11공신 중의 한 명이다.
곽광[霍光] 한나라 때 평양(平陽) 사람으로, 자는 자맹(子孟)이다. 곽거병(霍去病)의 이복동생이다. 원초연간(元初年間)에 대사마(大司馬)·대장군이 되어 유조를 받고 유주(幼主)를 보필하여 박륙후(博陸侯)에 봉해졌다. 이때 13년 동안이나 정사를 전적으로 처리했다.
곽광[霍光] 한 무제(漢武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명신으로,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고 김일제(金日磾) 등과 더불어 소제(昭帝)를 보필하면서 대사마(大司馬)·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소제가 죽자 창읍왕 하(昌邑王賀)를 맞아들여 제위(帝位)에 있게 했다가 그가 음란하다 하여 폐위시키고 다시 선제(宣帝)를 영입하는 등 전후 20년 동안 국정(國政)을 좌지우지하였다. <漢書 卷68>
곽광[霍光] 한(漢)나라 때의 명신으로 무제(武帝), 소제(昭帝), 선제(宣帝)를 내리 섬기면서 봉거도위(奉車都尉),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등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박륙후(博陸侯)에 봉해졌다. 곽광은 특히 소제가 죽은 뒤에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맞이해 와 황제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가, 유하가 황음무도(荒淫無道)하자 즉위시킨 지 27일 만에 폐위시키고서 다시 무제의 증손인 선제를 모셔 와 즉위시켰는데, 이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은 곽광과 같은 충성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하였다.
곽광[霍光] 한(漢)나라 무제(武帝)·소제(昭帝)·선제(宣帝) 때의 재상으로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이다. 소제가 8세로 즉위하자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들고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박릉후(博陵侯)가 되었다. 그러다가 소제가 후사 없이 죽자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그가 주색에 빠져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행동을 하므로 즉위 27일 만에 폐위하고 다시 무제의 증손인 유순(劉詢)을 맞이하여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바로 선제(宣帝)이다. <漢書 卷68 霍光傳>
곽광[霍光] 한나라 곽광(霍光)이 어린 임금 소제(昭帝)를 보좌하고 선제(宣帝)를 세워서 봉후(封侯)에 이르렀다. 한서 곽광전에 “불학무술(不學無術)이라.”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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