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목탑[管寧木榻] 삼국 시대 위(魏)의 명사 관녕(管寧)이 항상 검은 모자를 쓰고, 80세가 넘도록 50여 년 동안을 항상 목탑(木榻)에만 꿇어앉아 있었으므로, 그 목탑 위의 무릎 닿은 곳이 모두 구멍이 뚫리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권11 위지(魏志) 관녕전(管寧傳)의 “이는 관녕이 자신의 뜻과 조행을 온전히 지키려고 한 일이지 일부러 청고(淸高)함을 지키려고 한 일이 아니다.”에 대한 배송지(裴松之)의 주에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을 인용하여 “관녕은 늘 나무 의자 하나에 앉아 50여 년을 지내면서 한 번도 양다리를 쭉 뻗고 앉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평상의 무릎 닿은 곳이 다 닳았다.”라고 하였다.
관녕부해[管寧浮海] 후한(後漢) 말의 은자(隱者) 관녕이 요동(遼東)에서 37년을 지내다가 문제(文帝)의 부름을 받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浮海] 고향으로 돌아온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녕상혈[管寧床穴] 관녕은 동한(東漢) 말기 사람이다. 난세를 피하여 요동으로 옮겨 살았는데 백모(白帽) 차림에 한 목탑(木榻)만을 사용한 지 37년 만에 목탑은 그 무릎이 닿은 부분에 구멍이 뚫렸다 한다.
관녕슬[管寧膝] 관녕(管寧)은 자가 유안(幼安)으로 후한(後漢) 말기 삼국 시대의 학자이다. 요동(遼東)에 피난하여 시서(詩書)를 강습하였는데, 50여 년 동안 나무로 만든 평상에 무릎 꿇고 앉아 한 번도 다리를 뻗지 않아서, 평상 위의 무릎 닿는 곳이 모두 닳아 뚫렸다고 한다. <三國志 魏志 管寧列傳>
관녕조모[管寧皂帽] 관녕(管寧)은 자가 유안(幼安)으로 후한(後漢) 말기 삼국 시대의 학자인데, 황건적의 난리를 피해 요동 땅으로 건너간 뒤 조정의 거듭된 부름에도 일절 응하지 않은 채, 제자들을 가르치며 청빈하게 살면서 언제나 검은 모자[皂帽]를 쓰고 유유자적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녕조모[管寧皁帽]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학자 관영이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에 건너가서 20여 년을 있었는데, 그동안 위 명제(魏明帝)로부터 후례(厚禮)의 징소(徵召)가 있었으나 그는 한(漢)나라를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상 검은 두건[皁帽]만을 쓰고 청빈(淸貧)하게 지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녕탑[管寧榻]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관녕(管寧)은 자가 유안(幼安)인데 55년 동안 탑상(榻床)에 단정히 꿇어앉아서 공부하여 양쪽 무릎이 닿은 곳이 움푹 패었다 한다. <小學 善行>
관녕할석[管寧割席] 관녕이 자리를 가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관녕의 자는 유안이다. 화흠과 함께 텃밭에서 채소를 김매고 있었다. 흙을 고르는데 금이 있었다. 관녕은 기왓장이나 돌과 다르지 않게 호미질을 했다. 화흠은 그것을 잡았다가 던져 버렸다. 또 일찍이 한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때)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가 문밖을 지나갔다. 관녕은 전과 다름없이 책을 읽었지만 화흠은 책 읽기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관녕이 자리를 잘라[割席] 따로 앉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했다.[管寧字幼安. 與華欽共園鋤菜. 堅地有金. 寧揮鋤與瓦石不異. 欽捉而擲之. 又嘗同席讀書. 有乘軒冕過門者. 寧讀書如故. 欽廢書而看. 寧割席分坐曰 子非吾友也.]”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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