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句龍]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의 주에 의하면 구룡은 염제(炎帝)의 11세손으로 뒤에 후토신(后土神)이 되었다고 한다.
구룡[句龍] 구룡(句龍)은 상고(上古) 시대 공공씨(共工氏)의 아들로서 사(社)를 맡았다. 일찍이 수토(水土)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후세에 그를 후토(后土)의 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 주소(註疏)에 “구룡은 전욱(顓頊)의 토정(土正)이었는데, 뒤에 토지의 신으로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구룡[句龍] 토지신을 말한다. 그는 원래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이었는데, 수토(水土)를 잘 다스려서 뒤에 후토지신(后土之神)이 되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29年>
구룡[九龍] 구룡은 물을 다스린다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명나라 하경명(何景明)이 지은 구천행(九川行) 시에 “상제가 구룡을 내려보내 이 강한을 다스려 안정시켰네.[帝遣九龍下 治此江漢安]”라고 하였다. 또 송나라 여휘지(呂徽之)가 눈을 두고 지은 시의 첫 구절에 “천상의 구룡이 치수를 하였네.[天上九龍施法水]”라고 하였는데, 이 시도 눈을 두고 지은 시이므로 구룡을 인용한 것 같다.
구룡사[句龍社] 사직단을 가리킨다. 구룡(句龍)은 사직신(社稷神)의 이름이다.
구룡산[九龍山] 구룡산은 개성(開城) 평나산(平那山)의 별칭이다. 고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고려 태조(太祖)의 선계(先系)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5대조가 된다는 호경(虎景)이란 사람이 일찍이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자칭하며 백두산(白頭山) 등지를 유랑하다가 뒤에 개성의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인과 함께 평나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한 암굴(巖窟)에 들어가 자려고 하던 차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암굴 입구에서 으르렁거리므로, 성골 장군이 굴을 박차고 나가서 막 호랑이와 싸우려 하자, 호랑이는 이내 보이지 않고 갑자기 암굴이 무너져서 그 마을 사람 9인이 모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9인을 장사 지내기 위해 먼저 그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드리자, 산신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과부(寡婦)로 이 산의 주인이 되었는데, 다행히 성골 장군을 만났는지라, 우리 함께 부부(夫婦)가 되어 신정(神政)을 함께 다스리고 싶으니, 청컨대 이 산의 대왕(大王)이 되어 주오.” 하고는 이내 호경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군인(郡人)들이 호경을 봉하여 대왕으로 삼고 호경사(虎景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며, 그 마을 사람 9인이 함께 죽은 일로 인하여 그 산명(山名)을 구룡(九龍)으로 고쳤다. 그리고 성골 장군의 아들은 이름이 강충(康忠)이고, 손자는 이름이 보육(寶育)인데, 보육은 일찍이 출가(出家)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수도(修道)하다가 뒤에 다시 이 산 북쪽 기슭으로 돌아와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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