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거[宮車] 궁거는 제왕이나 후비가 타는 수레로, 궁거를 편안히 탔다는 것은 임금이 죽었음을 뜻한다.
궁거지안가[宮車之晏駕] 임금의 죽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사기(史記) 범수전(范睢傳)에 “궁거가 하루 아침에 편히 쉬게 되었으니 이것이 알 수 없는 일이다.[宮車一日晏駕, 是事之不可知者.]”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궁건[弓騫] 공자(孔子)의 제자인 중궁(仲弓)과 민자건(閔子騫)으로, 덕행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다.
궁검[弓劍] 군주의 죽음. 군주를 잃은 신하의 슬픔. 궁검은 군주가 남긴 활과 검을 이른다. 궁(弓)은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에 있는 구리를 채취하여 형산(荊山) 밑에서 정(鼎)을 만들었는데, 정이 완성되자 용 한마리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땅으로 내려와 황제를 맞이하였다. 황제가 용에 올라타자, 여러 신하들과 후궁 70여 명이 따라 올라탔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자, 나머지 신하들이 용에 타지 못하고 모두 용의 수염을 붙잡으니, 용의 수염과 황제가 지니고 있던 활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보니, 황제가 이미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과 수염을 안고 통곡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정호(鼎湖)’라고 이름 붙이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고 이름 붙였다.[黃帝采首山銅, 鑄鼎於荆山下. 鼎既成, 有龍垂胡髥, 下迎黃帝. 黃帝上騎, 羣臣後宫從上龍七十餘人. 龍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髥, 龍髥拔墮, 黃帝之弓. 百姓仰望, 黃帝既上天, 乃抱其弓與胡髥號, 故後世因名其處曰鼎湖, 其弓曰烏號.]”라고 보이며, 검(劍)은 당(唐)나라 장수절(張守節)이 지은 사기정의(史記正義) 오제본기(五帝本紀)의 주(注)에 “열선전(列仙傳)에, ‘황제가 스스로 죽을 날을 가려 신하들과 작별하고 죽어 교산(橋山)에 장사지냈는데 산이 무너지자 관은 텅 비었고 그 안에 검과 신발만이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다.[列仙傳云, 軒轅自擇亡日, 與羣臣辭還, 葬橋山, 山崩棺空, 唯有劒舃在棺焉.]”라고 보이는데, 두 고사를 합해 말한 것이다.
궁검[弓劍] 임금을 잃은 신하의 슬픔을 뜻한다.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鼎]을 주조하여 완성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승천하였는데, 이때 신하와 후궁 70여 명이 용을 타고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용의 수염을 잡았으나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과 검(劍)이 함께 떨어졌다. 이에 남은 백성들은 그 활과 검을 끌어안고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궁검[弓劍] 임금의 죽음을 이르는 것으로,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용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내려와서 황제(黃帝)를 맞자 황제는 시종하는 신하와 후궁(後宮) 70여 인을 거느리고 용에 올라탔다. 타지 못한 소신(小臣)들은 용이 하늘로 오르자 모두 수염에 매달렸으나 수염이 뽑혀 황제의 활[弓]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궁검거연[弓劍遽捐] 사기(史記) 권28 봉선서(封禪書)에,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어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鼎]을 다 만들고는 용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갈 때 황제의 활이 땅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황제를 교산(橋山)에 안장(安葬)한 뒤에 산이 무너져서 살펴보니 관이 비어 있고 오직 칼과 신발만 있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궁검막반[弓劒莫攀] 궁검은 임금이 승하한 것을 의미한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어 형산(荊山) 아래서 솥을 만들었는데, 그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수염을 드리운 용(龍)이 내려와서 황제를 맞으니 황제는 올라탔으나, 그때 황제를 시종한 여러 신하와 후궁(後宮) 70여 명은 타지를 못했다. 용이 마침내 올라가니 나머지 소신(小臣)들이 모두 용의 수염을 잡고 늘어졌으나 용의 수염이 뽑히면서 신하들과 황제의 활과 칼이 떨어졌다.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버리니 백성은 그 궁검과 용의 수염을 안고 울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28 封禪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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