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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哀詩三首[其二]칠애시3수2 / 칠애시 / 王粲왕찬

荊蠻非我鄕[형만비아향]   형주는 내 고향 아니거늘

何爲久滯淫[하위구체음]   어찌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랴

方舟泝大江[방주소대강]   방주로 큰 강 거슬러 오르려니

日暮愁我心[일모수아심]   날 저물어 가슴에 시름 드리네

山岡有餘映[산강유여영]   산등성이엔 석양빛 남아있는데

岩阿增重陰[암아증중음]   바위비탈에는 짙은 어둠 내리네

狐狸馳赴穴[호리치부혈]   여우와 살쾡이는 굴로 달려가고

飛鳥翔故林[비조상고림]   나는 새는 옛 숲으로 날아가네

流波激淸響[유파격청향]   물결은 부딪혀 맑은 소리 내고

猴猿臨岸吟[후원림안음]   원숭이는 강 언덕에 울어대네

迅風拂裳袂[신풍불상몌]   세찬 바람은 옷자락 날리고

白露沾衣襟[백로첨의금]   맑은 이슬은 옷깃을 적시네

獨夜不能寐[독야불능매]   홀로 지내는 밤 잠 못 이루고

攝衣起撫琴[섭의기무금]   옷깃 여며 일어나 거문고 타네

絲桐感人情[사동감인정]   거문고도 내 마음을 아는 듯

爲我發悲音[위아발비음]   나를 위해 슬픈 소리 내어주네

羈旅無終極[기려무종극]   떠도는 나그네 신세 끝이 없으니

憂思壯難任[우사장난임]   서글픈 마음 일어 견디기 어렵네

<七哀詩三首[其二]칠애시3수2 / 칠애시 / 王粲왕찬>


  • 왕찬[王粲]  후한(後漢) 말기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문인으로 자가 중선(仲宣)이다.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다. 박람다식(博覽多識)하고 문사(文詞)가 넉넉하였다. 후한(後漢) 헌제(獻帝)가 동탁(董卓)의 강요에 못 이겨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을 때 배종했고, 거기서 당대의 학자 채옹(蔡邕)의 눈에 들었다. 채옹(蔡邕)은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여겨 그가 올 때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마중하였다 한다. 17세 때에 사도(司徒)의 임명을 사양하였다. 얼마 후 동탁이 암살되어 장안이 혼란에 빠지자 형주(荊州)로 몸을 피해 유표(劉表)를 의탁해 15년을 지냈다. 유표가 죽자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을 설득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순시키고 자신도 승상연(丞相椽)이 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후에 조조가 위왕이 되자 시중(侍中)으로서 제도개혁에 진력하는 한편, 조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집단 안에서 문인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조식(曹植)과 더불어 조왕(曹王)으로 불렸다.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자 대표적 시인으로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고 유려하면서도 애수에 찬 시를 남겼는데 등루부(登樓賦), 종군시(從軍詩) 5수, 칠애시(七哀詩) 3수는 유명하다. 문집으로 왕시중집(王侍中集)이 있다. 왕찬이 일찍이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을 때 유표는 그의 외모가 못생기고 몸이 약하며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여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왕찬은 뜻을 얻지 못하고 고향이 그리워지자 당양성루(當陽城樓: 혹은 강릉성루江陵城樓)에 올라가 시사를 한탄하고 고향을 생각하며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文選 卷11 登樓賦><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 칠애시[七哀詩]  칠애(七哀)는 일곱 가지 슬픔이란 의미로, 위진(魏晉) 시대 악부(樂府) 가사(歌辭)의 시제(詩題)로 많이 쓰였다. 진(晉)나라 악부시가의 원시행(怨詩行)에 칠애(七哀)라는 편명이 수록되어 있다. 후한(後漢) 말의 왕찬(王粲)과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과 진(晉) 나라 장재(張載)의 칠애시(七哀詩)가 전하는데, 사회의 동란을 반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오언시(五言詩)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曺植)의 칠애시(七哀詩)가 유명한데, 이 시에 대한 문선(文選)의 주석란에 육신(六臣)의 한 명인 당(唐)나라 여향(呂向)은 “칠애는 아파서 슬프고, 의리상 슬프고, 느꺼워 슬프고, 원망스러워 슬프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슬프고, 입으로 탄식하며 슬프고, 코가 시어서 슬픈 것이다.[七哀謂痛而哀, 義而哀, 感而哀, 怨而哀, 耳目聞見而哀, 口歎而哀, 鼻酸而哀也.]”라고 하였다. <六臣註文選 卷23> 원나라 사람 이야(李冶)는 그의 저서 경제고금주(敬齋古今黈)에 “사람의 칠정 희로애락애오옥(喜怒哀樂愛惡欲) 중 哀가 가장 앞선 감정으로 슬퍼함이 너무 심하니 나머지 감정이 없어지고 애만 남았음으로 칠애(七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 형만[荊蠻]  형만(荊蠻)은 형주(荊州)로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땅이다. 초나라의 원래 지명은 형(荊)이고 주(周)왕실은 남방의 이민족을 만(蠻)이라고 불러 오랑캐 취급했다. 그래서 형만(荊蠻)이란 말은 남쪽의 오랑캐를 뜻한다. 당시 형주에는 중원의 전란이 미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찍이 왕찬의 조부 왕창(王暢)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는 왕찬의 집안과는 인연이 있었다. 이에 왕찬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려 것이다.
  • 체음[滯淫]  오래도록 머묾. 머묾이 오래됨.
  • 방주[方舟]  방주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연결한 배를 이른다.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여 하수를 건널 때에 다른 빈 배가 와서 나의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일지라도 성을 내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라고 하였다.
  • 암아[岩阿]  산굽이. 산모퉁이. 바위 비탈. 산골짜기. 성당(盛唐)의 시인 이기(李頎)의 시 등수양산알이제묘(登首陽山謁夷齊廟)에 “층층이 된 듯한 성 길로 수레 몰고 올라, 산골짜기 바라보며 슬피 탄식하네.[驅車層城路 惆悵此岩阿]”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왕찬(王粲)의 칠애시(七哀詩)에 “낮은 산봉우리에는 해질녘 빛이 깃들고, 산굽이엔 그늘 겹쳐 어두워지네.[山崗有餘映 巖阿增重陰]”라고 하였다.
  • 호리비조[狐狸飛鳥]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애영(哀郢)에 “하늘을 나는 새는 자기의 옛 둥지로 날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고향을 향해 눕는다.[鳥飛還故鄕兮 狐死必首丘]”라고 하였다.
  • 독야[獨夜]  홀로 지내는 밤. 아무도 없이 혼자 지내는 밤. 두보(杜甫)의 시 여야서회(旅夜書懷)에 “강가의 가는 풀 미풍에 흔들릴 때, 돛대 우뚝한 배 안에서 혼자 잠드네.[細草微風岸 危檣獨夜舟]”라고 하였다.
  • 섭의[攝衣]  옷매무새를 바로 함. 의복을 단정하게 함. 옷을 걷어잡음. 소식(蘇軾)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나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뭍으로 올라 험준한 바위를 밟고 가기도 하고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기도 하고 웅크린 호랑이처럼 바위 위에 앉기도 하고 뿔 달린 새끼용 같은 나뭇가지를 붙잡기도 하면서 솔개가 둥지를 튼 것 같은 같은 위태로운 곳으로 기어올라가 수신 풍이가 있다는 깊은 물을 내려다보았는데, 다른 두 사람은 내가 올라온 높은 곳까지 따라오지 못했다.[予乃攝衣而上, 履讒岩, 披蒙茸, 踞虎豹, 登虬龍, 攀棲鶻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不能從焉.]”라고 하였다.
  • 사동[絲桐]  거문고[琴금]의 별칭(別稱). 오동나무를 깎아 몸통을 만들고 실을 꼬아 현(弦)을 만들기 때문에 생긴 호칭이다. 또는, 거문고를 만드는 결이 고운 오동나무를 이르기도 한다.
  • 기려[羈旅]  객지에 머무는 사람. 정해진 곳 없이 떠돌다.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객지에 머물다. 나그네가 되어 타향(他鄕)에 있음을 말한다.
  • 기려[羈旅]  기(羈)는 기(寄), 려(旅)는 객(客). 나그네로서 말을 매어 놓은 채 벼슬하는 신하. 다른 나라 출신으로 임시로 와서 벼슬하는 사람. 타향에 임시로 우거(寓居)하여 살다. 또는 그러한 나그네. 사기(史記) 진기세가(陳杞世家)에 “타국에 임시로 우거(寓居)하는 나그네 신하[羈旅之臣]”라 하였고, 집해(集解)에서 가규(賈逵)의 주(注)를 인용하여 “기(羈)는 임시로 얹혀사는 나그네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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