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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鶴樓황학루 / 황학은 아니 오고 / 崔顥최호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렸는데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곳에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한번 간 황학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을 허공에 유유하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맑은 물에 한양의 나무 또렷 비치고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앵무주에는 방초가 울울 우거졌어라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그 어딘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물안개 피는 강 언덕에 시름 잠긴다

<登黃鶴樓등황학루 / 황학루에 올라 / 崔顥최호>


  • 최호[崔顥]  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변주(汴州: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사람이다.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11년에 진사가 되었고, 천보(天寶) 연간에 태복시승(太僕寺丞)과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냈다. 술과 도박을 좋아했고 미녀만을 골라 아내를 얻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바꾸기를 반복하였다. 일찍이 각지를 떠돌아 넓은 지역에 자취를 남겼다. 시를 잘 지었다. 특히 악부시를 잘 지었고, 민간의 가사를 즐겨 채용했다. 초기에는 도박(賭博)을 즐겼고,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 부염(浮艶)하고 경박(輕薄)한 시풍을 보였으나 나중에 변새(邊塞)를 다니면서 시풍도 웅혼(雄渾)하게 바뀌어 만년에는 풍골(風骨)이 뛰어난 시를 지었다. 그가 일찍이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지은 시(詩)인 황학루(黃鶴樓)는 이백(李白)도 절찬한 시로서, 이백(李白)은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갔으나, 최호(崔顥) 이상의 시를 지을 수 없다 하여 짓지 않았다 하며, 당나라 7언 율시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등루시(登樓詩)의 명작으로 꼽힌다. 그밖에 장간행(長干行)과 증왕위고(贈王尉古), 증양주장도독(贈梁州張都督) 등의 시가 있다. 구당서(舊唐書) 문원전(文苑傳)에서는 그를 왕창령(王昌齡), 고적(高適), 맹호연(孟浩然) 등과 나란히 올려놓고 있는데, 시로 얻은 명성과 달리 벼슬길에서는 부침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고, 고향인 변주에서도 그에 대한 전설이나 고사가 전해지는 게 별로 없다. 시로 얻은 명성과 달리 시(詩) 40여 수가 남아 전할 뿐이다. 명대(明代) 사람이 그의 작품을 모아 최호집(崔顥集)을 냈다.
  • 황학루[黃鶴樓]  지금의 중국 호북성(湖北省) 무한시(武漢市) 무창(武昌) 있던 누각 이름이다. 무창(武昌)의 황학산(黃鶴山: 사산蛇山) 아래 장강(長江)가에 세워져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 때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것은 옛터에 중건한 것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강의 수평선이 천리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 고대 4대 명루인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봉래각 중 하나로 지금은 무한(武漢) 장강대교(長江大橋) 어귀에 있다. 봉래각을 제외한 나머지 세 누각을 따로 강남의 3대 명루라고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황학루는 원래 신씨(辛氏)가 개설한 주점으로, 어느 날 찾아와 공술을 마시던 한 도사가 신씨를 위해 안주로 먹던 귤껍질로 벽에다 한 마리 학을 그려주었는데, 손뼉을 치면 학이 춤을 출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도사가 떠나간 뒤 손뼉을 치자 과연 그림 속의 학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이때부터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장사가 매우 잘되었는데, 10년이 지난 뒤 도사가 다시 와서 학을 데려가겠다고 하며 피리를 불어 노란 학을 불러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신씨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누각을 짓고 황학루(黃鶴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또, 옛날에 촉(蜀)의 비문위(費文褘)란 사람이 신선이 되어서 늘 황학(黃鶴)을 타고 황학산(黃鶴山)의 이 누각에서 쉬어가곤 하였다는 고사에서 이 누각을 황학루(黃鶴樓)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고금의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곳을 찾아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가 지은 (黃鶴樓), 이백(李白)이 지은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최호는 이 시를 짓고 이백(李白)으로부터 당인(唐人)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제일(第一)이라는 격찬(激讚)을 받았다. 이백(李白)의 시 강하증위남릉빙(江夏贈韋南陵氷)에 “내 장차 그대 위해 황학루를 때려부술 것이니, 그대는 나를 위해 앵무주를 짓밟으라[我且爲君槌碎黃鶴樓 君亦爲吾倒却鸚鵡洲]”라고 하였다. 참고로, 이백(李白)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남방으로 쫓겨가던 도중 황학루에 올랐던 일이 있다.
  • 황학루[黃鶴樓]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서쪽 황학기(黃鶴磯) 위에 있는 누대로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굽어볼 수 있고 천리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인석(陳仁錫)의 잠확거류서(潜確居類書)에 “황학산은 무창부성 서남쪽에 있고 사람들이 사산이라고 하는데 일명 황학산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선인 왕자안이 황학을 타고 와서 이곳에서 쉬었는데 무창현지에서 말하기를 황학산은 사행으로 서쪽으로 가다가 강을 만나는데 그 머리가 솟아 있는 곳에 황학루가 있고 황학루 아래는 황학기이다.[黃鶴山在武昌府城西南, 俗呼蛇山, 一名黃鶴山. 昔仙人王子安騎黃鶴憩此, 地志云: 黃鶴山蛇行而西, 吸於江, 其首隆然, 黃鶴樓枕焉. 其下卽黃鶴磯.]라고 하였다. 또, 보응록(報應錄)에 “강하군(江夏郡)에 신씨(辛氏) 한 사람이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한 노인이 와서 술을 청하자 두 말 없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다. 이렇게 반년 동안 계속하였는데, 하루는 그 노인이 와서 술값을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그 집 벽에다가 황학(黃鶴)을 그려 주었다. 술 취한 사람이 탁자를 치며 노래하자 이 그림 학이 나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이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신씨는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다시 와서 피리를 불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왔고, 노인은 이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신씨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학루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또, 방여승람(方輿勝覽)에 “이 누대는 산으로 인하여 황학루라는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였으니, 남조시대(南朝時代)부터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 남제지(南齊志)에 “선인(仙人)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하였다. 또, 옛날 촉(蜀)나라의 비문위(費文褘)란 사람이 신선이 되어 일찍이 황학(黃鶴)을 타고 이곳에서 쉬어 갔다는 고사에 의하여 이곳의 누각을 황학루(黃鶴樓)라 호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 황학선인[黃鶴仙人]  전설상의 선인 자안(子安)을 가리키는데, 일찍이 황학을 타고 황학루(黃鶴樓)에 날아왔었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읊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에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으니, 이곳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라고 하였고, 또 이백(李白)의 시 취후답정십팔이시기여추쇄황학루(醉後答丁十八以詩譏余搥碎黃鶴樓)에 “높다란 황학루를 이미 몽둥이로 쳐부수어, 황학 탄 선인이 의지할 곳 없게 되었다네. 황학이 하늘에 올라 상제께 호소하니, 되레 황학을 쫓아 강남으로 돌려보냈다네. 신명한 태수 다시 단장하고 꾸며서, 하얀 벽에 새로 그리니 아름다움 되돌아왔네.[黃鶴高樓已搥碎, 黃鶴仙人無所依. 黃鶴上天訴玉帝, 却放黃鶴江南歸. 神明太守再雕飾, 新圖粉壁還芳菲.]”라고 하였다. <南齊書 卷15 州郡志下> <全唐詩 卷130 黃鶴樓> <全唐詩 卷178 醉後答丁十八以詩譏余搥碎黃鶴樓>
  • 천재[千載]  천세(千歲). 천년(千年). 천 년의 세월. 천 년이나 되는 세월이라는 뜻으로, 오랜 세월을 이르는 말.
  • 유유[悠悠]  유구하다. 요원하다. 유유하다. 한가한 모양. 허공에 떠 있는 모양. 정처 없이 떠도는 모양. 정해진 곳 없이 떠도는 것을 가리킨다.
  • 역력[歷歷]  분명한 모양, 뚜렷한 모양. 모든 것이 환히 알 수 있게 똑똑함.
  • 한양[漢陽]  지명.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무한시(武漢市) 한양현(漢陽縣) 일대에 해당한다.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에 있는데, 무창(武昌)의 서북쪽에 있으며, 황학루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인다.
  • 방초[芳草]  향초. 향기롭고 꽃다운 풀. 충절을 비유하기도 한다.
  • 처처[萋萋]  초목이 자라 무성한 모양. 풀이 우거진 모양. 무성하다. 우거지다. 빽빽하다. 문채가 화려하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갈담(葛覃)에 “칡넝쿨이 자라나, 골짜기까지 뻗어서, 그 잎들이 무성하네.[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萋萋.]”라고 하였고, 모전(毛傳)에 “처처는 무성한 모양을 말한다.[萋萋茂盛貌]”라고 하였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떠나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 돋아나 무성하구나.[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하였다.
  • 앵무주[鸚鵡洲]  지금의 중국 호북성(湖北省) 무한시(武漢市) 무창(武昌) 서남쪽 장강(長江) 가운데에 있는 정주(汀洲)로 경치 좋은 곳으로 이름이 있다. 후한(後漢) 때 문장이 뛰어났던 예형(禰衡)이 일찍이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朝)의 아들 황사(黃射)가 베푼 주연에 참석했을 때, 마침 앵무(鸚鵡)를 바쳐 온 자가 있어 황사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즉석에서 앵무부(鸚鵡賦)를 지어 그에게 주었는데 당시에 명문(名文)으로 널리 알려졌다.이후 연회가 열렸던 곳의 이름이 앵무주(鸚鵡洲)가 되었는데, 대강(大江) 남쪽 강하현(江夏縣)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예형은 뒤에 황사의 아버지인 황조(黃祖)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황조에게 살해된 예형의 장례가 이곳에서 치러진 뒤, 이백(李白)이 앵무주(鸚鵡洲)라는 시를 지어 “안개 걷힌 난초 잎에 향기로운 바람이 따뜻하고, 복사꽃 핀 언덕 사이 비단물결 일렁이네.[烟開蘭葉香風暖 岸夾桃花錦浪生]”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의 시 차운양행선(次韻陽行先)에 “비록 기린각에 초상은 못 올랐지만, 앵무주의 화해는 이미 도피하였네.[雖未麒麟閣 已逃鸚鵡洲]”라고 하는 등 역대 수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시를 지어 남겼다. <藝文類聚>
  • 향관[鄕關]  고향.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고향(故鄕)의 관문(關門). 곧 고향(故鄕)의 지경(地境).
  • 연파[煙波]  안개나 연기(煙氣)가 자욱하게 낀 수면(水面). 멀리 연기나 안개가 부옇게 잔뜩 낀 수면.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하게 낀 연기. 강호에 은거함을 이르기도 한다. 참고로, 당 나라 장지화가 벼슬을 그만둔 뒤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범택부가(泛宅浮家)하며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있다. 연파(煙波)는 연무(煙霧)가 창망하게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강호를 말한다. <新唐書 張志和傳>
  • 강상[江上]  강가의 언덕 위. 강의 위쪽. 강기슭.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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