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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당비[姦黨碑]~간덕촌[看德邨]~간독삼천[簡牘三千]


간당비[姦黨碑]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1년(1085)에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고 나서 왕안석(王安石)이 신종(神宗) 때에 실시한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옛 법을 회복하였는데, 소성(紹聖) 1년(1094)에 장돈(章惇)이 재상이 된 뒤에 다시 사마광 등을 배척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며, 휘종(徽宗) 숭녕(崇寧) 1년(1102)에 채경(蔡京)이 재상이 된 뒤에는 사마광·문언박(文彦博)·소식(蘇軾)·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姦黨)으로 지목하여 이른바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하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에 천하에 반포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19 徽宗本紀, 卷472 姦臣列傳2 蔡京>

간당비[姦黨碑]  송 휘종(宋徽宗) 때에 간신 장돈(章惇)·채경(蔡京)·채변(蔡卞) 등이 권력을 잡고 원우현사(元祐賢士)로 불리는 사마광(司馬光)·정이(程頤)·소식(蘇軾)·유지(劉摯) 등 120인을 간당이라 하여 그 성명을 돌에 새겨 단례문(端禮門) 밖에 세웠다가 성변(星變)으로 인해 그 비석을 깨뜨려 버렸는데, 그 뒤에 당적에 든 사람의 자손들이 오히려 그들 선조의 이름이 당적비에 들어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다시 모각(摹刻)하였다. <宋史 卷472 蔡京傳>

간당지화[奸黨之禍]  송 신종(宋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사마광(司馬光),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으로 지목하여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후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 천하에 반포하게 한 일을 말한다.

간덕촌[看德邨]  명나라의 유민이 살던 곳.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였을 때와 한족의 재건 국가인 남명(南明)이 망한 1661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유민들이 우리나라로 피난해 왔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받아들여 거제부 간덕촌에서 함께 살게 하였다.

간도[間道]  샛길을 말한다.

간도주지[間道奏之]  샛길로 가서 보고함을 이른다.

간독[竿牘]  긴 상소문을 말한다.

간독[簡牘]  편지(便紙). 옛날 종이가 보급(普及)되기 전(前)에 글을 쓰기 위(爲)하여 사용(使用)되었던 대쪽과 얇은 나무쪽에서 유래(由來)하였다.

간독삼천[簡牘三千]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공거(公車)에 이르러서 무려 3000독(牘)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주문(奏文)을 올려 임용해 주기를 청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그 상소를 읽느라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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