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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무기[公子無忌]~공자사우[孔子四友]~공자앙[公子卬]


공자모[公子牟]  공자 모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위공자(魏公子) 모(牟)이다. 중산(中山)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중산 공자 모라고도 한다. 일찍이 “몸은 강해에 있지만 마음은 위나라 대궐에 있다.[身在江海之上 心居乎魏闕之下]”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본래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 나오는데,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별집 권29 부귀(富貴)에 인용되어 있다.

공자무기[公子無忌]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중의 하나인 위(魏)의 신릉군(信陵君)이다. 위 소왕(魏昭王)의 아들이며, 식객 3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매부(妹夫) 신릉군(信陵君)과 위(魏) 안리왕(安釐王)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위왕(威王)이 진비(晉鄙)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조(趙)나라를 구원케 하였으나 위왕(威王)은 진(秦)나라가 두려워 중도에서 관망만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신릉군(信陵君)은 자기 식객 후영(侯嬴)의 계략을 써서 왕의 애첩인 여희(如姬)를 꾀어 위왕(威王)의 호부(虎符)를 훔쳐 거짓 왕명으로 군사를 진격시키려 하였다. 진비(晉鄙)가 이를 의심하자 주해(朱亥)를 시켜 진비(晉鄙)를 죽여 버리고 결국 진군(秦軍)을 대패시켜 조(趙)나라를 구원해 주게 된다. <史記 魏公子列傳>

공자미[公子亹]  소공(昭公)의 아우이다.

공자사우[孔子四友]  안연(顔淵), 자공(子貢), 자장(子張),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공자석번영[孔子惜繁纓]  번영(繁纓)은 제후의 거마(車馬)에 채우는 뱃대끈과 가슴걸이를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위나라에 공이 있어 위나라에서 그에게 상으로 읍을 주니, 그는 읍을 사양하고 제후의 말에 채우는 번영을 요구하였는데, 위나라에서 그것을 허락했다. 공자가 그 사실을 듣고 이르기를 “애석하다. 읍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신분에 맞지 않는 기(器)와 명(名)을 함부로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공자앙[公子卬]  위혜왕(魏惠王)의 아들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상앙(商鞅)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공자앙은 위군(魏軍) 대장이 되어 대항하였다. 그는 상앙과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교분이 있었다. 강화회담을 구실로 상앙의 초청을 받은 공자앙은 주연석상에서 진나라의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가 이끈 위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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