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액진채[孔子厄陳蔡] 주경왕(周敬王) 31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孔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공자영[公子郢] 위영공(衛靈公)의 서자로 자는 자남(子南)이다. 영공(靈公)에 의해 대부에 봉해졌고 현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에게 참소를 받아 송나라로 도망치자 영공은 공자영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남자가 다시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공자영은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다고 말하여 결국 영공의 뒤는 위출공(衛出公)이 이었다. 그는 완고하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절조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공자영을 수절(守節)이라고 칭했다. 후에 괴외와 출공이 부자지간임에도 서로 군주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에서 그는 몸을 피해를 해를 입지 않았다. 시호는 소자(昭子)다.
공자오쇠[孔子吾衰] 공자(孔子)가 젊어서는 주공(周公)의 도를 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간혹 꿈에 주공을 보았었는데, 늙어서는 그 의지조차 시들어 또한 꿈에 주공을 보지도 못하자, 이를 탄식하여 이르기를 “심하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이어라, 다시는 꿈속에 주공을 뵙지 못하였다.[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고 한 것을 가리킨다. <論語 述而>
공자왈맹자왈[孔子曰孟子曰] 공자왈 맹자왈 한다. 글방 선비들이 다만 공맹(孔孟)의 전적(典籍)을 읽으며 그에 하등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음을 보고 하는 말이다.
공자왕손[公子王孫] 왕이나 귀족의 자제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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