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장[龜藏] 귀장은 귀갑을 간직함을 뜻한다. 사기(史記) 권128 귀책열전(龜策列傳)에 “하나라와 은나라의 점치려는 사람들은 시초나 귀갑을 사용했는데, 점을 치고 나면 이를 곧 버렸다. 귀갑을 오래 간직하면 영험이 없고, 시초 또한 오래 보관하면 신통함을 잃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귀장[歸藏] 상(商) 나라의 역(易). 고대 삼역(三易)의 하나이다.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전하는 역이다. 수서(隋書) 권32 경적지(經籍志)에 나온다. 역에는 연산역(連山易), 귀장역(歸藏易), 주역(周易)의 삼역(三易)이 있는데, 현재는 주역(周易)만이 전해진다.
귀장[鬼章]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사마온공신도비문(司馬溫公神道碑文)에 의하면 “적의 큰 두목 귀장 청의를 사로잡아 와서 대궐 아래에 결박시켰다.[生致大首領鬼章靑宜結闕下]”고 하였으니, 즉 오랑캐의 두목을 지칭한 말이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귀장(鬼章)은 곧 토번(吐蕃)의 수령(首領)으로 송 신종(宋神宗) 때 아리골(阿里骨)과 함께 자사(刺史)를 지냈다. 아리골(阿里骨)이 즉위하여 혹독한 형벌을 베풀어 부하들을 불안하게 하였는가 하면, 원우(元祐) 2년(1087)에는 귀장(鬼章)을 핍박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주(洮州)를 점령하도록 하니, 귀장(鬼章)은 조주(洮州)를 침입하였고, 막천성주(邈川城主)의 숙부인 온계심(溫溪心) 등은 아리골(阿里骨)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귀장(鬼章)은 결국 충의(种誼)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귀장[龜腸] 고인들이 흔히 거북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기(氣)만 마시고 산다고 여긴 데서, 전하여 굶주린 창자, 즉 빈궁한 사람을 비유한다.
귀장[歸葬] 타향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운구하여 고향에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귀장[歸裝] 체임되어 돌아갈 때의 행장. 돌아갈 차비를 함.
귀장구루[歸藏岣嶁] 귀장역(歸藏易)은 고대의 황제(皇帝)가 만든 것이고, 구루비(岣嶁碑)는 우(禹)임금의 비석이라고 전해진다. 구루비는 한유(韓愈)의 구루산시(岣嶁山詩)에 나오고, 귀장역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나온다.
귀장역[歸藏易] 고대 역(易)의 이름인데 황제(黃帝)가 지었다 한다. 주례(周禮)에 “태복(太卜)이 삼역(三易)의 법을 맡았는데, 1은 연산(連山), 2는 귀장(歸藏), 3은 주역(周易)이다.”라 하였다. 일설에는 은(殷) 나라 시대 역인데 곤(坤)으로 첫머리를 삼았다 한다. 은역(殷易)이라고도 한다.
귀장유단[歸葬由單] 돌아가서 장사를 지내겠다는 말미 신청 단자(單子)를 이른다.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 토번(吐蕃)의 여러 족장 가운데 한 명이다. 송 신종(宋神宗) 희녕(熙寧) 6년(1073)에 왕소(王韶)가 희하(熙河)를 평정할 적에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 이 하주(河州)의 답백성(踏白城)을 침략하였는데, 신종(神宗)이 초무(招撫) 하여 그를 자사(刺史)로 삼았다. 그러나 원우(元祐) 원년에 다시 배반하자, 8월에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을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호송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방면하였다. 동파(東坡: 蘇軾소식)가 사로잡은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을 처리하는 방안을 논한 인금귀장론서강하인사의차자(因擒鬼章論西羌夏人事宜箚子)를 올렸다. 희하(熙河)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임조(臨洮) 지역이다. 왕소(王韶)는 신종(神宗) 때의 문신(文臣)으로 서하(西夏)와 강족(羌族) 등의 외이(外夷)들을 평정할 것을 주장하는 평융책(平戎策)을 올려 신종(神宗)의 가납(嘉納)을 받고, 희하(熙河)에서 오랑캐들을 몇 차례 공격하여 승리한 다음 그 공로로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 <宋史 王韶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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