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곡[金谷] 금곡은 진(晉)나라 대부호(大富豪)인 석숭(石崇)의 별장이 있는 금곡원(金谷園)을 가리킨다. 석숭은 매양 이곳에 빈객(賓客)을 모아서 시부(詩賦)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매우 호사스럽게 놀았다.
금곡[金谷] 진(晉) 나라 때 부호로 유명했던 석숭(石崇)의 원명(園名)인데, 석숭이 일찍이 이곳에 빈객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을 때, 각각 시를 지어서 회포를 서술하게 하고 혹 시를 짓지 못하면 술 서 말을 벌주로 마시게 했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원의 주수에 따라 벌주를 마시게 하리라.[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고 하였다.
금곡기[金谷妓]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 서북 금수(金水)가 둘린 곳에 진(晋) 나라 석숭(石崇)이 이곳에다 동산을 만들어 뭇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 이것을 금곡원(金谷園)이라 한다. 금곡기(金谷妓)는 곧 진(晉) 나라 때 석숭(石崇)이 금곡원(金谷園)에서 주연(酒宴)을 하면서 데리고 놀던 애기(愛妓) 녹주(綠珠)를 말한다.
금곡노배[金谷奴輩] 금곡은 중국 하남(河南) 낙양시(洛陽市) 서북쪽에 있는 땅 이름인데, 진 무제(晉武帝)때 부자 석숭(石崇)이 그곳에 호화로운 별장[金谷園]을 만들어 놓고 호사를 누렸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자기의 애첩 녹주(綠珠)를 달라는 권신 손수(孫秀)의 요구를 거절한 일로 그의 모함에 걸려 처자 등 일족 15인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처형되기 위해 수레에 실려 동시(東市)로 나갈 때 한탄하기를 “종놈들이 내 재산을 탐낸 것이다.”라고 하자, 압송해가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재산이 해를 끼치는 줄 알았으면 어찌 일찌감치 분산시키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晉書 卷三十三>
금곡녹주[金谷綠珠] 금곡은 진(晉)나라 부호 석숭(石崇)의 정원 금곡원(金谷園)이며, 녹주(綠珠)는 석숭의 애기(愛妓)이다. 손수(孫秀)가 녹주를 탐내어 달라고 하였으나 석숭은 거절하였다. 손수가 앙심을 품고 조서를 꾸며 석숭을 잡으러 오자, 녹주는 누각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晉書 卷33 石崇列傳>
금곡돌차[金谷咄嗟] 금곡은 진(晉)나라 때 부호(富豪)였던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을 가리키는데, 석숭은 매양 금곡원에 빈객(賓客)을 모아서 주연(酒宴)을 베풀곤 했던바, 그는 빈객을 위해 팥죽 또한 아주 신속하게 쑤워 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금곡롱리곤[琴曲弄離鵾] 옛날에 서로 화답하는 노래 가운데 있었다는 곤계곡(鵾鷄曲)이다.
금곡면[金谷面] 금곡원(金谷園)은 진(晉)나라 때의 부호(富豪)인 석숭(石崇)의 원명(園名)이다. 그는 이곳에 빈객들을 모아 놓고 미녀를 대동한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금곡원의 얼굴[金谷面]’은 금곡원에 있었던 미녀들의 얼굴이라는 의미이다. <世說新語 汰侈> 소식(蘇軾)의 시에 “또 못 보았나 금곡원은 얼음 깨는 겨울에도 초목은 봄이었던 걸, 휘장 아래 요리한 사람은 모두가 미인이었네.[又不見金谷敲氷草木春 帳下烹煎皆美人]”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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