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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벌배[金谷罰盃]~금곡벌주[金谷罰酒]~금곡유연[金谷遊宴]


금곡벌배[金谷罰盃]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마시게 하는 술을 가리킨다. 중국 진(晉)나라 석숭(石崇)이 자신의 정원인 금곡원(金谷園)에서 빈객들과 연회를 열고, 시를 짓지 못한 사람에게는 서 말의 벌술을 내렸다는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 春夜宴桃李園序>

금곡벌주[金谷罰酒]  ‘금곡(金谷)의 벌주’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내리는 것이다. 진(晉)나라 석숭(石崇)이 자신의 정원인 금곡원(金谷園)에서 빈객들과 연회를 열고, 시를 짓지 못한 사람에게는 세 말의 벌술을 내렸다는 고사가 있다. 석숭의 금곡원시서(金谷園詩序)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春夜宴桃李園序>

금곡벌주[金谷罰籌]  금곡(金谷)은 진(晉)나라 대부호 석숭(石崇)의 별장이 있는 금곡원(金谷園)을 가리킨다. 석숭은 이곳에 빈객을 모아서 시부를 짓고 술을 마시며 호탕하게 놀았는데, 정해진 시간에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석 잔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이 고사를 인용하여 “만약 시를 짓지 못한다면 금곡원의 벌주 숫자를 따라 벌을 내리겠다.[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고 하였다. <古文眞寶 卷2 春夜宴桃李園序>

금곡원[金谷園]  진대(晉代) 부호(富豪)인 석숭(石崇)의 별서(別墅) 이름이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서북쪽 금곡간(金谷澗)에 옛터가 남아 있다. 석숭의 금곡시서(金谷詩序)에 “나는 별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남 경계의 금곡 냇가에 있다. 높고 낮은 곳에 맑은 샘과 무성한 숲이 있고 여러 과실과 대나무와 약초 등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余有別廬 在河南界金谷澗中 或高或下 有淸泉茂樹 衆果竹木草藥之屬 莫不畢備]”라고 하였다.

금곡원[金谷園]  서진(西晉)의 대부호 석숭(石崇)의 별장으로 당대(唐代)에 이미 황폐화되었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서북쪽에 그 터가 있다. 석숭(石崇)은 여기에서 빈객을 불러들여 술을 즐기면서 호화롭게 살았다. 하루는 진 무제(晉武帝)에게 두어 자쯤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하사받은 왕개(王愷)가 석숭에게 이를 자랑하였다. 석숭이 철여의(鐵如意)로 그 산호수를 때려 부수고는 자기 집에 있는 산호수를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높이가 서너 자나 되는 것이 많았다. 이처럼 사치를 일삼던 그는 녹주(綠珠)라는 아름다운 기생첩을 요구하는 세도가 손수(孫秀)의 청에 불응하다가 결국 몰락하였다. <晉書 卷33 石崇列傳>

금곡원[金谷園]  서진(西晉)의 부자 석숭(石崇)의 별장 이름이다. 형주자사(荊州刺史), 대사농(大司農) 등 고관을 역임한 석숭(石崇)은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 하양(河陽) 서쪽 금수(金水)가 흐르는 골짜기에 웅장한 별장을 짓고, 당시의 부자 왕개(王愷)와 사치를 다투었다. 석숭(石崇)은 달리 재택(梓澤)이라는 이름의 금곡원(金谷園)에서 자주 잔치를 베풀고, 참석자들에게 시(詩)를 짓게 하여, 미처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 삼배(三杯)를 돌리며 환락을 누렸다.

금곡원제노[金谷怨齊奴]  금곡원(金谷園)에서 제노(齊奴)를 원망함. 금곡원(金谷園)은 진(晉) 나라 석숭(石崇)의 별장이고 제노는 제 왕경(齊王冏)을 말한다. 석숭에게 애첩(愛妾) 녹주(綠珠)가 있었는데, 손수(孫秀)가 여인을 탐내어 석숭의 생질인 구양건(歐陽建)을 잡아 가두고 그녀를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이에 숭과 건을 죽이려는 계략으로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숭이 잡혀가게 되었는데, 숭이 그녀에게 “내가 너 때문에 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녀가 울면서 “죽음으로써 절개를 보이겠다.” 하고 누대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晉書 石崇傳>

금곡유연[金谷遊宴]  시회(詩會)를 말한다. 진(晉)의 석숭(石崇)이 그의 별장인 금곡원(金谷園)으로 빈객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시회를 열었는데, 만약 시편을 이루지 못하면 술 3말을 벌로 마시게 하였다 한다. <金谷園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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