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錦官]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옛 이름이다. 두보(杜甫)가 거기 살면서 자칭 금리선생(錦里先生)이라 하였다.
금관[金官] 가야금(伽倻琴)을 말하는 것이다. 가야금이 가야 땅에서 창작되었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금관[金官] 김해(金海)의 고호이다.
금관[金管] 충효(忠孝)를 기록하는 붓을 말한다. 양(梁) 원제(元帝)가 상동왕(湘東王)이었을 때 세 종류의 붓이 있어서 충효가 온전한 사람은 금관(金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덕행이 맑고 순수한 사람은 은관(銀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은 반죽관(斑竹管)의 붓으로 기록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太平廣記 卷200>
금관[金管] 금 대롱의 붓.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손광헌(孫光憲)의 북몽쇄언(北夢瑣言)을 인용하여 “양 원제(梁元帝)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붓 세 종류가 있었는데, 금은으로 장식한 것과 반죽(斑竹)으로 대롱을 만든 것이 있었다. 충효가 온전한 자에게는 금관(金管) 붓으로 써주었고, 덕행이 정수(精粹)한 자에게는 은관 붓으로 써주었고, 문장이 섬려(贍麗)한 자에게는 반죽 붓으로 써주었다”고 했다.
금관[金棺] 동관(銅棺)으로, 옛 사람은 구리를 금이라고 하였다. 지하를 파고 구리를 녹여 붓고서 그 위에 관을 놓았다. <史記 秦始皇本紀>
금관국[金官國] 신라가 일컫던 가락국의 딴 이름이다. 지금 김해.
금관서[金管書] 양(梁)나라의 원제(元帝)가 상동왕(湘東王) 시절에 늘 충신과 의사 문장가들의 일을 기록하면서 세 가지 붓을 갖추어 놓고, 충효를 갖춘 자들은 금으로 장식한 붓으로 쓰고, 덕행이 있는 자는 은으로 장식한 붓으로 쓰며, 문장이 아름다운 자들은 반죽관을 썼다고 한다. <御定佩文齋書畫譜 卷19>
금관성[錦官城] ‘금관성’은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에 있는 성으로, 이곳에 삼국 시대(三國時代)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공명묘(孔明廟)가 있다. 두보의 시 촉상(蜀相)에 “승상의 사당이 어디에 있는고. 금관성 밖 측백나무 무성한 곳일세.[丞相祀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고 하였다.
금관성[錦官城] 금관성은 촉한 소열제(蜀漢昭烈帝)의 도읍지인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현 사천성 성도현(成都縣) 서남이다. 두보가 이곳에 완화초당(浣花草堂: 두보초당杜甫草堂이라고도 함)을 짓고 지냈다.
금관성[錦官城]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을 지칭한다. 옛날에 비단을 주관하는 관서의 소재지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로 인해 성도(成都)를 금관성이라 칭하기도 한다.
금관성[錦官城] 나주(羅州)의 고호이다.
금관자[金貫子] 금으로 만든 관자(貫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인데 품계에 따라 그 재료와 새김장식이 달랐다. 신분에 따라 금(金)・옥(玉)・호박(琥珀)・마노・대모(玳瑁)・뿔・뼈 따위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금관홍습처[錦官紅濕處] 붉게 핀 꽃이 가랑비에 살포시 젖어 평소보다 무겁게 보이면서 축 늘어져 있는 시적인 광경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아침에 일어나 붉게 젖어 있는 곳을 보라, 금관성(錦官城)에 꽃이 무겁게 매달려 있으리니.[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0 春夜喜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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